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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1979년 10. 26. 사태에서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총맞고 사망한 후,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영화 '서울의 봄(2023)'에서 보듯이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하나회 세력이 군부 쿠데타로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권과 정국의 주도권을 가져왔다. 다음 해에는 5. 17. 내란-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제주도가 제외되었던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였고, 하나회 전두환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도처에서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서울역 집회를 해산했고, 신군부는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그 곳에 모여 있던 학생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켰다. 또 국회를 점령하고 봉쇄했다. 휴교령이 내려지고 모든 대학교에 군부대가 들어왔다. 신군부의 야만적..

2024. 12. 7. 한국의 온 시민들과 국회의원, 전세계가 주목한 내란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 소추안 표결에서 국민의 힘은 단체로 자리를 비웠다. 탄핵 의결이 되는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12월 7일에는 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고, 전후에 연동된 여러 사건들과 같이 평가될 것이다. 역사가 움직이는 큰 틀은 이미 정해졌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잔가지로 분기되는 자식 사건들이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는 구체적으로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어떻게 보면 자연과 역사의 장면을 저버린 한국의 정당 '국민의 힘'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한걸까? 민주 공화당(1963 ~ 1979, 박정희 시기)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 독일 친위대(SS)의 아돌프 아이히만은 신분을 숨기고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가 1960년 이스라엘의 모사드에게 붙잡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다.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관여하는 업무를 하였다.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을 기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내는 정책의 최종책임자였다. (당시 아이히만을 데려오는 이스라엘의 불법 납치도 지금의 극우화된 이스라엘을 보면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을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라고 했다. 맡았던 업무와는 다르게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 아빠였기도 했다. 동료 사이에서도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그냥 주어진 업무로써 상부의 명령에 따른걸까? 그의 말대로 그는 기계장치의 부속장치였을 뿐이고 범죄자는 따로 있는 것이..

2차 세계대전의 단초가 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다 갖다붙인 느낌이다;, 줄여서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세력이 휘하의 에른스트 룀 등의 나치 돌격대(SA) 세력과 반나치 인사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대두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평범한 화가 지망생에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원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에서 육군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면제를 받았지만 자진해서 당시 바이에른 왕국군의 소속으로 싸웠다. 1914년 현재 벨기에의 이프르 지역에 발령을 받고 소속 연대 약 3,600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엄청난 인명의 죽음앞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것은 그에게 특..

독립운동가 이관술(1902 ~ 1950) 이관술은 1902년에 태어났다. 그는 아직까지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다. 일본의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집안도 꽤 잘 살았던 양반 집안에서 당시 아무나 하기 힘들었던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다. 당시 도쿄제국대학(현 도쿄 대학)보다 도쿄고등사범학교가 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 때까지는 사회주의에 큰 관심이 없었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사가 된 후 그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다. 이관술은 역사와 지리 과목을 맡았다. 해박한 지식과 진보적인 교육관으로 학생들에게 인기도 꽤 많았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이관술의 제자였던 독립운동가 이순금(1912 ~ 미상, 이관술의 친동생)..

해방 후 현재 명동 롯데백화점 부근 위치한 정판사에서 조선공산당 소속 이관술 외 10명이 위조 지폐를 만들었다고 판결되었던 사건이다.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술, 박낙종, 권오직, 송언필, 신광범과 노동자 김창선, 김상선, 김우용, 박상근, 정명환, 홍계훈이 각각 징역 10~15년부터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다. 이 중 이관술과 송언필은 6. 25. 전쟁 발발 후 이뤄진 대전형무소 학살사건(1950)에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이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 사건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불법 활동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어떤 블로그에는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당시 있지도 않았던 남로당의 음모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당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과 사건을 ..

6. 25. 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 6. 25. 전쟁은 한국군과 유엔군 사망자 약 18만명, 민간인 사망자 약 40만명(행방불명과 북한측 민간인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200만명 이상이다. 밝혀지지 않은 것도 고려하면 더 클 것이다.)의 피해를 남겼다.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보다도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이루어졌다. 전쟁전까지 포함해서 제주 4. 3. 사건, 여순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산청·함양 학살 사건 등 전국 각지 도처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이승만도 이 학살 사건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념은 그냥 사람을 모으는 수단이자 구호일 뿐이다. 종교처럼 집단을 결속하는 장치다. 당시 한국은 안그래도 전후 혼란의 시기에 미군정의 식량 ..

과거에는 황색언론이라고 부르던 것을 오늘날엔 그냥 언론이라고 부릅니다.We used to call such media ‘yellow journalism’; today we call it ‘journalism’ for short.존 스튜어트, America: A Citizen's Guide to Democracy In Action 조지프 퓰리처의 미국행 황색언론은 언론 보도가 사회에 제공하는 기본적인 기능을 잃고, 오직 판매 부수 증대만을 위해 선정적인 보도나 가짜 뉴스를 배포하는 행태를 나타내는 용어다. 퓰리처상의 그 조지프 퓰리처(1847~1911)가 황색언론의 기원이다. 그는 당시 헝가리에서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시기에 북군이 외인부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입대하기로 결정한다...

19세기 맬서스 트랩(Malthusian Trap) 맬서스 트랩은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파 토마스 맬서스의 책 《인구론,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에서 나온 개념이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니 인구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맬서스의 이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1851)이나 우생학과 마찬가지로 당시 인류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당시 19세기에는 인구수와 식량의 부족에 대해 공포심이 있었고, 분위기가 염세적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구라고 한다면 도구의 도구가 없었다. 과학이란 수치화할 수 있는 부분만 떼어서 보자고 할 때가 있다. 인자를 제한하고 닫힌 계를 설정한다. 혹은 맞는 방향이지만 불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