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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역사의 분기점 -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 사건(1946) 본문
해방 후 현재 명동 롯데백화점 부근 위치한 정판사에서 조선공산당 소속 이관술 외 10명이 위조 지폐를 만들었다고 판결되었던 사건이다.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술, 박낙종, 권오직, 송언필, 신광범과 노동자 김창선, 김상선, 김우용, 박상근, 정명환, 홍계훈이 각각 징역 10~15년부터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다. 이 중 이관술과 송언필은 6. 25. 전쟁 발발 후 이뤄진 대전형무소 학살사건(1950)에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이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 사건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불법 활동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어떤 블로그에는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당시 있지도 않았던 남로당의 음모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당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과 사건을 증명해주지 못하는 부실증거(어떤 인쇄소에서도 있을 수 있는 물품들), 판사의 판결문수정, 검사의 구형논고 등을 본다면 이 사건이 조작되었을 것이란 결론을 얻는다.
해방 후 정세와 미군정의 실패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리틀보이, 펫 맨)으로 인해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하고 패전국이 되었다. 일본은 한국에서도 철수를 서둘러야 했는데, 마지막 약 20일동안 조선총독부는 약 30억원의 위조 지폐를 찍어내고 튀게 된다. 민간 인쇄소에게도 맡겨 엄청나게 뽑아댔다고 한다.
이 위폐의 효력을 이어 들어온 미군정이 인정해버린다. 이후 위폐를 구분할 수 없게 돼 화폐 체계가 혼란해졌다. 물가 상승과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에 이어 친일 경찰을 비롯한 관료들의 재기용까지 한국인들은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는 상태였다.(10월에는 대구에서부터 항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주 4. 3. 사건 등의 한 배경이 된다.)
해방 후 지금의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과는 다르게 조선공산당은 당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국내에서 이뤄지는 독립운동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또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처우를 신경쓰는 유일한 정당이었다.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노선을 이행하는 합법 정당이었다.
혼란한 해방의 분위기에서 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가 결렬되고, 미국의 매카시즘이 한국으로 전염되어 반공주의가 득세해갔다. 광복 후 다른 국가에 의한 신탁통치는 좌우를 떠나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오보사건(1945. 12.)으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국가가 소련이라는 정반대의 인식이 전파되었다. 이에 남한에서 공산당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이런 와중에 정판사 위폐 조작사건이 벌어진다.
뚝섬 위조지폐 사건(1946. 5.~)
근택빌딩 정판사는 사설 인쇄소였다. 당시 공산당의 반박헌영 파벌인 김철수파가 돈을 모아 근택빌딩을 인수했고, 김철수는 조선공산당의 정당활동을 위해 사용을 허가했다. 조선공산당 내에서 박헌영에게 대항하는 기반을 만들고자 한 측면이 크다. 일제 때부터 인쇄소에서 일하던 정판사 직원인 '김창선'으로부터 이 사건이 시작된다. 당시 정판사의 6명의 노동자는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와는 관련이 없었고, 회사와 잘 지내보려는 차원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을 했다.
조선총독부의 한국뜨기 전 마지막 위폐 발행에서 사설 인쇄소에도 맡겨서 일을 처리했는데 이게 근택인쇄소에서도 이루어졌다. '김창선'은 이 때도 일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지폐 원판 3매를 빼돌리고 낭승구, 낭승헌, 배재룡 등에게 팔아 넘기게 된다. 그들이 위조지폐 발행을 하거나 혹은 공모하다가 중부경찰서에 적발된 것이다. 이게 뚝섬 위조지폐 사건이다. 이들 중 이원재라는 사람이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뚝섬지부 조직부장이었고 사건 초기 안그래도 위폐에 의한 혼란이 있는 시기에 우익단체의 관련 의혹이 제기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정판사로 불이 옮겨 붙는 과정에서 조병옥 당시 경무부장도 '이 사건은 뚝섬 사건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당시 미군정의 개입을 생각하게끔 하는 말이다.
정판사 사건으로 붙이 옮겨 붙다.
그런데 갑자기 5월 8일 경찰이 조선정판사를 급습해 조선공산당 소속 11명을 검거한다. 당시 미군정은 뚝섬 위폐 사건으로 우익단체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 불편한 상황이었고, 카메라의 프레임은 뚝섬에서 급속하게 명동 정판사로 이동한다. 경찰은 이들을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 냈다.(김창선이 지폐 원판 3매를 빼돌린 것인데 2조 6매라고 허위 자백 등)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여기서 일제 고문전문가 노덕술을 3번째로 다시 만났다.
이 사건은 공산당에 의한 혼란을 야기하는 목적의 위조 사건으로 발전했다. 급하게 진행되다보니 사건기록도 모순투성이였고, 증거도 빈약했다. 사건이 기소된 후 공판 과정에서 검사도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기록도 있고, 시기가 맞지 않는 모순점을 판사가 판결문을 조작해서 유야무야 넘기는 사태도 있었다. 고문피해자들의 고문 관련 진술이 매우 세세한데다, 마지막 검사의 구형논고는 이러한 조작행태에 대한 한탄으로 채워져 있다.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들과 죄없는 사람들을 사건을 조작하여 합법이란 외피를 씌워 질식사시킨 것이다.
사건과 재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의 임성욱 교수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정판사 위폐 사건 블로그 - 임성욱 교수
이후의 변화
이 사건 이후로 일제 출신 경찰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쪼이는 닭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반공주의가 득세했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 때부터 공산당의 방법도 거칠어져 갔다. 박헌영의 남로당은 이 때 살아남은 조선공산당을 규합해 결성되었다. 대구에서는 빈곤과 친일 경찰들의 복귀로 인해 10월 항쟁이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번졌다. 이 사건도 제주 4. 3. 사건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으로 실행한 사건이라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한국은 공산주의 국가였을 것이다. 아니 공산주의가 세계를 다 먹었을지도 모른다. 반미주의라고 곡해하지 않길 바란다. 미군정은 실패했다. 여타 나라에 개입하여 역설적인 풍선효과를 만들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그랬다.
공산주의자들이 민중들의 기저에 있는 에너지 분출에 숟가락을 얹어 보고자 한 것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것은 대세에 큰 영향을 준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다음 역사에 많은 부분이 결정되었다. 쪼이는 닭으로 규정된 빨갱이들은 죽여도 된다는 야만이 판치고, 가족이나 친구도 쪼이는 닭으로 규정된 그를 옹호하기는 커녕 같이 폭력에 참여해야만 하는 야만적인 참극이 생기게 되었다. 노덕술, 김종원, 김창룡 등 괴물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무기가 되었다. 6. 25. 전쟁의 수많은 학살의 배경에도 이 사건이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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