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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시대가 낳은 독립운동가 이관술 본문
독립운동가 이관술(1902 ~ 1950)
이관술은 1902년에 태어났다. 그는 아직까지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다. 일본의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집안도 꽤 잘 살았던 양반 집안에서 당시 아무나 하기 힘들었던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다. 당시 도쿄제국대학(현 도쿄 대학)보다 도쿄고등사범학교가 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 때까지는 사회주의에 큰 관심이 없었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사가 된 후 그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다. 이관술은 역사와 지리 과목을 맡았다. 해박한 지식과 진보적인 교육관으로 학생들에게 인기도 꽤 많았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이관술의 제자였던 독립운동가 이순금(1912 ~ 미상, 이관술의 친동생)과 이효정(1913 ~ 2010)이 남긴 이관술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마치 지금과도 같은 즐거운 학교생활이 떠오른다. 이관술은 광주학생항일운동(1929)에서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받고, 더 큰 세상을 만났다.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 1. 운동 이후 있었던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다. 당시는 일제의 문화 통치기로 언뜻 보기에는 유화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 노선에 위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놓고 누르면 터진다는 것이다. 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이면에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먼저였다.
실제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만연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그러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의 차별과 비합리적인 대우로 인해 촉발되었다. 1929년 전에도 차별대우와 식민지 교육에 대한 저항으로 한국의 학생들이 서울, 함흥, 대구, 평양, 동래, 진주 등에서 연쇄적으로 동맹휴학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1929년에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 학생과 광주중학교(지금의 중학교가 아니다)의 일본 학생이 통학 열차안에서 시비가 붙었다.
일본 학생의 모욕으로 시작된 싸움이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 싸움의 정리과정에서 경찰은 한국 학생들만 구타하고, 일본 학생들의 편을 들었다. 이후 한국 학생 최상현이 일본 학생에게 단도로 찔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 패싸움이 시작된다. 이 패싸움은 점점 항일투쟁으로 변했으며 신간회의 도움으로 전파되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한다.
아 은혜로운 이관술 선생님.
돌이켜 보면 제가 20세가 되도록 어머니 품안에서 어리광쟁이 고집쟁이로 자라온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취직시켜 주신다고 손수 차표를 사서 부산행 기차에 태워 주시고 울산 도착하면 사람이 나와 안내해줄테니 겁먹지 말고 그 사람을 따라가라고 자세히 타일러주시던 선생님.
그렇게 자상하고 배려깊은 이관술 선생님이 정판사 사건이라니요?
선생님, 선생님.
- 독립운동가 이효정
조선반제동맹 - 혁명가가 된 이관술(1932)
이관술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소극적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실망을 하고 제자들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로 변화한다. 동덕여고보통학교는 이후에도 해마다 학생시위를 벌였는데, 다른 교사와는 다르게 학생들을 적극 지원했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1931년 독립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받자 동료교사들과 함께 동반사직투쟁을 주동하기도 했다. 이 때 한글의 띄어쓰기 및 현대식 쉬운 글쓰기 방법에 기여한 독립운동가 신명균과 함께했다.
1932년 중순 이관술은 이순근, 조정래와 조선반제동맹을 결성하고 활동한다. 6개 조항으로 ①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② 수업료 감면③ 학교 내 경찰 침입 반대 ④ 입학에 대한 한국인과 일본인 차별 반대 ⑤ 졸업생 취직에 대한 학교의 의무 ⑥ 여자 교육에 대한 차별 철폐 를 내세웠다. 산하 독서회에서 학생과 졸업생, 타학교 학생들과 교류를 하고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그러다 1933년에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된다. 이관술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지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 때부터 친일 경찰 노덕술(1899 ~ 1968)과의 악연이 시작된다.
물고문, 전기고문,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고문과 고춧가루를 탄 물을 주전자로 붓는 고문, 손톱 밑에 바늘을 꽂아넣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 고문 후유증은 건강에도 영향을 미쳐 이관술은 평생 폐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러다 병으로 인한 보석으로 풀려나게 되는데, 여기서 형무소에서 탈출한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 이재유(1905 ~ 1944)를 만나게 된다.
이재유는 코민테른 노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직된 국제주의자들과 다르게 발을 디딜 수 있는 아래, 구체적 삶에서부터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공산주의자였다. '경성트로이카'운동이 그런 생각을 반영했다.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1893 ~ 1976)도 대장정의 과정에서 소련의 개입에서 벗어나고 두각을 드러냈는데 포지션이 비슷하다. 코민테른 노선에 맹목적인 추종을 하거나, 책에서 나온 것에만 단선적으로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각종 변장술부터 밑바닥 생활의 노하우를 이관술에게 전수한다.
경성재건그룹 - 독립운동가 이재유와 의기투합(1934)
이관술은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고생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이재유를 만나고 의기투합하였는데, 이관술은 이재유에 대해 언제나 명석하고 늘 구체적인 방법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관술은 자신의 엘리트로서의 약점을 극복하려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일하고자 했는데, 이재유가 이에 대해 현재의 능력으로 바로 진행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학교와 공장에 독서회를 조직했고, 이관술의 활동으로 가입한 노동자가 많았다고 한다. 권영태 그룹과의 지휘권 문제로 경성 지역에서의 통합은 실패하고, 1935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열풍을 맞는다. 이 때 강원도의 지역을 도보로 이재유와 다니기 시작했고, 지하생활에 대한 방법들을 배웠다고 한다. 폭설로 인한 강추위에 둘은 서로의 알몸을 문질러가며 마을을 찾기도 했다. 둘은 현재의 창동 부근에서 수해민 형제로 위장해 집을 지어 살았다.
이 시기에 '경성준비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하게 된다. 1936. 12. 25. 크리스마스에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이관술과의 마지막을 예감했다고 한다. 조직원 최호석과의 약속은 일제의 함정이 되었고, 이재유는 경찰에 잡히게 된다. 여기서 이재유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이병희(1918 ~ 2012)의 목격에 따르면 수용실에서 만난 이재유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경성콤그룹 - 일제 말기 대표적인 항일운동(1939)
이관술은 다시 강원도로 향하고, 위장하고 전국을 다니며 노동운동 및 독서회 등의 지하운동을 이어 갔다. 1937년에 출소한 동생 이순금과 만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순금은 다시 9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동생이 다시 석방된 후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권오직, 박진홍, 정택식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1939) 이 '경성콤그룹'은 당시 언론에 기사 한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언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1940년대의 시기는 독립운동하기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
이관술은 궤짝을 메고 다니는 방물장수, 구두닦이, 엿장수, 고물장수 등으로 변장하고 전국을 다닌다. 일제 말기 버텨온 국내 운동가들이 대부분 '경성콤그룹'에 합류했다고 한다. 여기서 동덕여고보에서 동반사직투쟁을 같이 한 신명균과도 연결되었다. 함경도의 광산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항일무장투쟁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 시기 박헌영(1900 ~ 1955)도 영입되었다.
그런데 1941년에 결국 다시 수감되고 말았다. 노덕술과 두번째 만남이었다. 노덕술은 인간의 존엄을 버린 자다. 아마 한 번 해보자란 생각이 들었을 거다. 너도 물리적인 폭력 앞에 제약된 짐승아니냐고. 이관술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허위 진술을 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절대 털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1943년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자주 피를 쏟아냈다고 한다. 몸이 조금 회복되자 다시 재수감 처분이 내려왔고, 그는 잠적을 준비한다. 이관술의 딸은 아버지를 다섯살 때 보고 6학년일 때 다시 본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잠적 후, 가족과 친척들도 고초를 겪었다. 이후에도 지하운동을 하다 광복을 맞는다.(1945)
광복 후(1945)
그의 행적은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유명했다.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그는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다음의 높은 순위를 받았다. 그는 사막을 건너와 이제 시대가 키운 지도자로서의 행보가 시작되는 듯 보였다. 가족들과도 재회하고, '조선인민공화국'(여운형이 주도한 당시 건준위에서 수립)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으로도 올려지거나, 선출되었다.
이후 일제 패망 전 소련은 성급하게 숟가락을 올리려 만주를 거쳐 북한까지 진입했고 종전 후 결과적으로 한국에 38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세계는 파시즘의 홍역을 치르고, 냉전체제로 다시 양극으로 분리되었다. 미군정은 식량 정책 등의 실패를 하게 되고,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1946)으로 한국 독립에 큰 지분을 갖고 있던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한다. 이관술은 이 조작 사건으로 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3번째 감옥에서도 학교부지를 위해 500평의 땅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1950) 그의 가족도 연좌제로 고초를 겪었다. 이관술의 사위와 이복동생도 보도연맹학살 사건(1950)으로 인해 죽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보기관에 의해 유가족이 여러 차례 소환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저런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그의 공산주의 전력과 정판사의 조작 판결에 의해 지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를 반영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늦었지만 그 것이 후손인 우리의 의무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독립운동을 하고서도 광복 후 다시 감옥에 수감되어 삶을 다했지만 그는 승리했다. 그 승리를 우리는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사건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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