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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나치 독일의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 1934)

Toolofv 2024. 12. 9. 15:53

 
2차 세계대전의 단초가 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다 갖다붙인 느낌이다;, 줄여서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세력이 휘하의 에른스트 룀 등의 나치 돌격대(SA) 세력과 반나치 인사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대두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평범한 화가 지망생에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원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에서 육군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면제를 받았지만 자진해서 당시 바이에른 왕국군의 소속으로 싸웠다. 1914년 현재 벨기에의 이프르 지역에 발령을 받고 소속 연대 약 3,600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엄청난 인명의 죽음앞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것은 그에게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그는 종전 후에도 군대에 남아있었고 뮌헨의 공산주의 정권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군에서 초기의 독일 노동자당을 접한다. 당시 독일은 패전 후의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을 맞고 있었다. 이 것은 독일의 큰 정치적 불안을 불러왔다. 극좌파나 극우파에 의한 무장 난동이 끊이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극우파들에게 영합하는 연설로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극우파들은 돌격대 병력을 이용해 뮌헨 맥주홀 폭동(1923)으로 뮌헨 지역에서 관련 정부 인사들을 감금하고 정부의 해산을 선포한다. 하지만 엉성한 시도로 인해 실패했고 히틀러는 여기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재판에서 히틀러는 단번에 독일에서 떠오르게 된다. 법정은 히틀러에게 연설의 무대가 되었고, 극우 파시스트 세력에서 히틀러가 지도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재판은 여러 사회적 입김이 작용해 정해진 법률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히틀러는 금고 5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 (이 재판의 주심판사는 히틀러 집권 후 대법원장에까지 오른다.) 그마저도 6개월 이후 나치당이 해산되었다고 판단한 주 정부는 그를 석방시킨다. 
 
이후 대공황(1929)까지 겹치면서 정치판의 구도는 양쪽의 극단 세력쪽으로 기울어져 갔고, 나치당은 1928년 총선의 2.6%의 지지율에서 1930년 총선의 18.3%까지 급상승하는 기염을 보인다. 1932년의 대선에서도 나치당 히틀러는 36.7%의 지지율을 기록한다. 여러 정치적 여파속에 당시 파울 폰 한덴부르크(1847~1934) 대통령은 합법적(?)으로 나치당에게 내각을 넘기게 된다. 히틀러의 '모 아니면 도'인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이 계속해서 먹혀들어갔고, 당시 프란츠 폰 파펜 내각과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내각의 실패로 어부지리를 얻었다. 그래도 이 때까지는 내각에 대한 해산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있었다.
 
1933년 누군가 국회의사당에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치당은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몰아가고 당시 독일의 폭력적인 공기를 자극해 입법부의 권한을 행정부에게 이전하는 수권법(1933)을 통과시키고야 만다. 당시 바이마르 헌법은 특정 법률에 의해 수정이 가능했다(;). 이로써 독일은 민주주의 공화국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나치당의 독재 정권을 완성했다.
 

나치 돌격대(SA)

 
 
돌격대는 처음에는 나치당의 소속은 아니었다. 나치 대중집회의 경호원 모임으로 시작한 단체다. 초창기 대원들은 바이마르의 퇴역군인으로 이루어진 자유군단(Freikorps) 소속이 많았다. 1923년 뮌헨 폭동이 실패함에 한동안 활동을 멈추었으나 1925년에 재조직되어 나치당의 휘하로 들어갔다. 나치당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하부에서 작동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에 정규군보다 규모가 컸고, 나치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이런저런 정치깡패들까지 가입해 약 200만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결국 1933년에 나치당의 합법노선에 대한 반발로 돌격대(SA)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히틀러는 지휘권을 인수하고 에른스트 룀을 이들의 리더로 지정한다. 그러나 룀 또한 자신을 2인자로 칭하는 등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리는 등의 행동이 있었다. 이들은 공산당을 반대하면서도 노동자 중심의 좌파 성향이 있었고 당시 우파세력을 포섭해 권력을 잡으려던 나치당과 충돌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의 군부는 프로이센 '융커'라고 불리는 귀족세력이 잡고 있었고 전쟁영웅 파울 폰 한덴부르크 대통령으로 대표되고 있었다. 융커 세력은 돌격대 세력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고, 히틀러는 수권법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라 군부 귀족 세력과 타협을 하고 돌격대 세력을 숙청하게 된다. 히틀러도 융커세력을 누르고 싶었음에도.(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침공에서 됭케르크 철수 작전의 성공은 독일의 융커 세력의 전공을 바라지 않았던 히틀러의 판단이었다.)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 1934)

 
 
나치당이 정권을 잡고 이외의 다른 정당들을 해산시켰음에도 합법적인 대통령의 해산 권한이 신경쓰였고, 돌격대(SA)의 에른스트 룀은 집권까지의 공적을 내세우며 권한을 요구했다. 그들은 '제2의 혁명'을 부르짖었다. 독일 군부 귀족세력들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군대를 세우기까지 요구하기에 이르고 히틀러와 나치당은 돌격대 휘하의 친위대(SS)세력을 이용해 이들을 숙청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나치당과 히틀러도 저 군부 귀족세력을 견제했지만 일정정도는 같이 가야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사망 후 권력을 가져오는데 군부는 돌격대의 처리를 요구했고 그러지 않을 경우 계엄령 선포를 통한 군부 통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군부 귀족세력도 줄다리기 끝에 나치 친위대(SS)의 존재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괴링과 힘러 등은 '살생부 명단'을 작성해 숙청을 준비한다. 1934년 6월 30일, 히틀러와 친위대는 룀을 비롯한 돌격대 세력과 반나치 세력을 전원 기습체포해 숙청했다. 재판이나 그 어떤 절차도 없이 즉결 '처단' 했다. 룀이 쿠데타를 하려 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나치당의 반대 세력들도 다 죽였다. 총 90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추정되며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 한다. 단 3일 동안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에서 숙청당한 에른스트 룀,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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