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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상흔 - 대전형무소 학살사건(195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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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상흔 - 대전형무소 학살사건(1950)

Toolofv 2024. 11. 27. 01:44

 

6. 25. 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

 
 
6. 25. 전쟁은 한국군과 유엔군 사망자 약 18만명, 민간인 사망자 약 40만명(행방불명과 북한측 민간인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200만명 이상이다. 밝혀지지 않은 것도 고려하면 더 클 것이다.)의 피해를 남겼다.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보다도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이루어졌다. 전쟁전까지 포함해서 제주 4. 3. 사건, 여순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산청·함양 학살 사건 등 전국 각지 도처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이승만도 이 학살 사건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념은 그냥 사람을 모으는 수단이자 구호일 뿐이다. 종교처럼 집단을 결속하는 장치다. 당시 한국은 안그래도 전후 혼란의 시기에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로 인해 이념이고 뭐고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간에 하루하루 밥먹는 게 더 중요하고, 삶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 때에 친일 경찰과 국방경비대(이후 한국군)의 대립과 아직 남아있는 가문주의(마을에 경찰집안, 군인집안이 있냐),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뭐라도 해야한다는 압박감, 리더의 부재 등이 겹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 스트레스가 약자에게 향했다.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었다.
 
 

대전 형무소 학살 사건 -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1950)

 
 
6. 25. 전쟁이 발발하고 대전 형무소의 수감자들이 산내 골령골에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한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버티면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는데, 이 때 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서도 학살이 발생했다. 참여정부 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이 되었다.
 
당시 1949년부터 형무소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수감되기 시작했고, 북한의 남침 이후 보도연맹원도 들어왔다고 한다. 제주 4. 3. 사건 관련 수감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또 엄혹했던 1930년 이후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송언필도 정판사 위조지폐 사법살인 사건(1946)으로 인해 수감되어 있었다.(독립운동가 이관술은 악질 고문으로 유명한 시대의 배설물 노덕술에게 일제강점기때도 2차례 고문당했는데 정판사 사건으로 또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미군정과 당시 경찰, 검찰, 재판부의 막장 콜라보 사건이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방어선 전투 이후 오산 죽미령 전투, 평택 전투, 진천 전투, 천안 전투, 공주 대평리 전투 등을 거치며 북한군은 계속 아래로 내려왔고, 이미 대피해있는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 재소자 및 보도연맹원들의 북한 전향을 우려해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몇 차례의 시도로 나누어 낭월동 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는 대전에서 국군이 퇴각하기 직전인 7월 16일까지 지속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기록에 따르면 약 4900명의 사람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유해에는 10대와 여성의 인골도 상당수라고 한다. 골령골 사건의 학살지시자는 당시 대전지검장 정재환(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 시행자는 제주 4. 3. 사건에서 학살을 했던 송요찬 대령이었다. 또 최근에 당시 미국고문관의 연관도 밝혀졌다. 살아 남은 유족들은 빨갱이로 몰려 이에 대한 피해를 제대로 토로하기는 커녕, 연좌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북한이 점령했을 7월 21일 당시에는 이 집단희생을 인지하고, 한국군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에게 폭력을 동반해 자술서를 쓰도록 강요했으며 사상검증을 실시했다. 국군 장교, 판사, 검사는 전부 사형당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히 퇴각하면서 남한이 퇴각할 때와 똑같이 국군에 도움이 될만한 우려가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제거되었다. 이때만 1600여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국군이 대전을 수복하고도 이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또 다시 북한에 대해 협조하거나 전향한 부역 혐의자를 찾아내고, 낙인찍고 만들어내 대전형무소에 감금하는 등으로 괴롭혔다. 이런 상흔과 폭력의 공기는 국민들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휴전 후의 사회에서도 끈질기게 없어지지 않았다. 

 

공식적인 조사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이 많았을 거라고 추정된다. 지금도 학살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땅을 파보면 유골이 나오는 곳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예산이 없어서 다시 묻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소방대원들이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트럭이 그 앞에 와서 죄수들을 쏟아부었지요. (트럭에 실린) 죄수들이 도착하면 억지로 돼지 새끼 끌어내리듯 끌어내린 겁니다"

"소방수들이 죄수들을 구덩이 앞에 엎어서 눕혀 놓고 물러나면 사수는 왼발로 (죄수) 발을 밟고 총구를 대각선으로 겨냥합니다. '사격 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참, 사람이 못할 일이었습니다"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골이 튀어나와 온몸에 튀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이 나지요"

"사수가 물러나면 기관단총으로 다시 두 번을 왔다 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확인사살을 합니다"

 
 

유해발굴과 현재의 상황 

 
 
2015년부터 이 사건에 대한 유해발굴이 시작되었고, 2021년에 희생자들의 유해 1441구가 발굴되었다. 평화공원 조성사업은 현재 멈춰있는 상태다. 그래도 2022년에 그동안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유전자 감식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한다. 현재 여러 지역에 걸쳐 조금씩 신원파악이 이루어지는 첫 단계를 지나고 있다. 한국의 보수당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화한다. 알고보면 이승만과 박정희는 보수당이 좋아할 만한 인물이 아닌데도 말이다. 한국의 역사 곳곳에 이러한 미화작업에 의한 안개나 왜곡이 있다. 시간대가 현재와 가까울수록 아직 확정할 수 없는 논쟁이 있는 사항이라고 물타기한다. 우리는 이제 색안경을 벗고서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가 되었다.
 
 

<골령골 학살 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촬영된 군인과 경찰의 총살 직전 장면.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은 1950년 7월 골령골 학살 현장을 찍어 본국으로 보냈고, 이 자료는 비밀문서로 분류 50년동안 비공개돼 왔다. - 출처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대전형무소에서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자 '양민을 탄압·학살한 혐의' 등으로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1500여 명을 붙잡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북한군은 퇴각 직전인 1950년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수감자들을 집단 처형했다. 정치보위부 간부가 심사 및 처형 명령을 내렸고, 인민군과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이 총살을 집행했다. 조사 결과 충남지역 우익인사 희생자는 1557명이었다. - 출처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대전 산내 골령골 1학살지 A구역 유해발굴 사진(2021.09.10) - 출처 : https://blog.naver.com/seocheon/223021203590>

 
 

<대전 산내 골령골 1학살지 A구역 유해발굴 사진(2021.09.10) - 출처 : https://blog.naver.com/seocheon/223021203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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