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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독립운동가 이관술(1902 ~ 1950) 이관술은 1902년에 태어났다. 그는 아직까지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다. 일본의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집안도 꽤 잘 살았던 양반 집안에서 당시 아무나 하기 힘들었던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다. 당시 도쿄제국대학(현 도쿄 대학)보다 도쿄고등사범학교가 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 때까지는 사회주의에 큰 관심이 없었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사가 된 후 그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다. 이관술은 역사와 지리 과목을 맡았다. 해박한 지식과 진보적인 교육관으로 학생들에게 인기도 꽤 많았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이관술의 제자였던 독립운동가 이순금(1912 ~ 미상, 이관술의 친동생)..
해방 후 현재 명동 롯데백화점 부근 위치한 정판사에서 조선공산당 소속 이관술 외 10명이 위조 지폐를 만들었다고 판결되었던 사건이다.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술, 박낙종, 권오직, 송언필, 신광범과 노동자 김창선, 김상선, 김우용, 박상근, 정명환, 홍계훈이 각각 징역 10~15년부터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다. 이 중 이관술과 송언필은 6. 25. 전쟁 발발 후 이뤄진 대전형무소 학살사건(1950)에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이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 사건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불법 활동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어떤 블로그에는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당시 있지도 않았던 남로당의 음모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당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과 사건을 ..
6. 25. 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 6. 25. 전쟁은 한국군과 유엔군 사망자 약 18만명, 민간인 사망자 약 40만명(행방불명과 북한측 민간인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200만명 이상이다. 밝혀지지 않은 것도 고려하면 더 클 것이다.)의 피해를 남겼다.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보다도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이루어졌다. 전쟁전까지 포함해서 제주 4. 3. 사건, 여순사건, 보도연맹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산청·함양 학살 사건 등 전국 각지 도처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이승만도 이 학살 사건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념은 그냥 사람을 모으는 수단이자 구호일 뿐이다. 종교처럼 집단을 결속하는 장치다. 당시 한국은 안그래도 전후 혼란의 시기에 미군정의 식량 ..
과거에는 황색언론이라고 부르던 것을 오늘날엔 그냥 언론이라고 부릅니다.We used to call such media ‘yellow journalism’; today we call it ‘journalism’ for short.존 스튜어트, America: A Citizen's Guide to Democracy In Action 조지프 퓰리처의 미국행 황색언론은 언론 보도가 사회에 제공하는 기본적인 기능을 잃고, 오직 판매 부수 증대만을 위해 선정적인 보도나 가짜 뉴스를 배포하는 행태를 나타내는 용어다. 퓰리처상의 그 조지프 퓰리처(1847~1911)가 황색언론의 기원이다. 그는 당시 헝가리에서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시기에 북군이 외인부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입대하기로 결정한다...
19세기 맬서스 트랩(Malthusian Trap) 맬서스 트랩은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파 토마스 맬서스의 책 《인구론,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에서 나온 개념이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니 인구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맬서스의 이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1851)이나 우생학과 마찬가지로 당시 인류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당시 19세기에는 인구수와 식량의 부족에 대해 공포심이 있었고, 분위기가 염세적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구라고 한다면 도구의 도구가 없었다. 과학이란 수치화할 수 있는 부분만 떼어서 보자고 할 때가 있다. 인자를 제한하고 닫힌 계를 설정한다. 혹은 맞는 방향이지만 불완전..
볼테르(1694 ~ 1778)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5세가 집권하던 시기에 활동한 계몽사상가이자 작가이다.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Tolerance)'의 아버지이다. 관용을 이야기할 때면 나오는 아이콘이다. 그의 본명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François-Marie Arouet)' 볼테르의 젊은 시절 볼테르는 당시 부르주아지, 부유한 공증인 아버지로 인해 꽤 윤택한 생활을 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고, 귀족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그의 대부 샤토뇌프 신부가《르 템플(le Temple)》이라는 사교 모임에 데리고 나가면서, 여러 자유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법조인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볼테르는 문인이 되고자 했다. 법학 대학을 다니면서 문학적 재능을..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국때의 대표적인 사법농단 사건이다. 당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여파로 독일에 대한 프랑스인의 감정은 상당히 격화되어있던 때였다. 마치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했다고 보면 비슷할지 모르겠다. 이러한 과정에 프랑스는 2차대전 후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처럼 내부에서 쪼이는 닭을 만들게 되었고, 여기에 유대인 드레퓌스가 걸렸다(1894). 드레퓌스는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를 독일에 유출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별다른 증거도 없이 유죄판결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프랑스령 기아나 악마섬이란 곳에 유배되었다. 수사 당시 증거를 보여달라는 드레퓌스에게 수사관은 아무 연유없이 권총 자살을 권유하는 막장을 보였다. 재판에서 나온 증거는 비슷하다고 인정될 수 없는 필적..
조선시대 왕을 생각해보자. 퓨전사극 드라마에 간간이 등장하는 소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조선시대 왕이 된다면 어떨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누릴 거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왕은 생각보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 수가 없다. 마치 바둑에서 주어진 바둑판에 어디에 두느냐는 자유롭게 361개의 둘 곳중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지만, 이기려면 자유롭게 두지 못하는 것과 같다. 스타크래프트라도 어떤 건물을 지을지, 일꾼은 얼마나 뽑을지는 나의 선택이지만, 이기려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조선 왕은 잠을 6시간 이상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새벽 5시쯤 일어나 종실 웃어른에게 문안(그냥 잠옷입고 문안하는 게 아니었겠지..)을 하고, 아랫사람에게 문안을 받았다. 아침먹고..
6. 25. 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폭풍 224'라는 암호명을 가진 사전 계획에 따라 남한에 기습남침했다.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한 일본을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한국이 재건되는 시기였다. 당시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서둘러 전공을 올리고자 하였고, 이는 한반도의 38도선(지금의 휴전선과 조금 다르다.)을 선으로 긋게 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한과 북한 지역을 임시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전후 일본군 처리 등을 하면서 협상을 하였으나 결렬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2차 국공내전(1946 ~ 1949)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미국은 1949년에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했고, 애치슨 라인을 그었다(미군정의 실패는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