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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우스 전략과 제2차 포에니전쟁(BC218~BC202) 본문
파비우스 전략은 상대의 전투 단계의 강점을 봉쇄하고 지연전을 통해 보급의 한계를 강요하면서 요지를 점령하는 방식의 전략이다. 제2차 포에니전쟁(BC218~BC202)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를 대적하는 로마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대응에서 유래했다. 결과적으로 한니발의 원정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해 자연히 한계를 드러내고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소극적으로 보이는(?) 면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잃고 파비우스는 해임당하기도 했다. 로마가 파비우스의 전략을 끝까지 유지해 나갔다면 한니발의 명성도 지금같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에서는 너무 신중하고 당시 미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위치를 위협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에서 조지 메클레런 장군의 전략도 그랬다. 당시 전쟁의 양상은 총기의 발전으로 인해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군의 인명 피해를 줄이고 지속가능한 전쟁수행 구조의 틀을 잡았다. 선진적인 전략을 채택한 점은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러시아 원정(1812)에서 쿠투조프의 청야 전술도 싸워주지 않고 상대의 몰락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파비우스 전략과 비슷하다. 당시 쿠투조프도 프랑스군 10명을 제거하고 러시아군사 1명을 잃느니 싸우지 말라고 했다가 욕을 먹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호남의 곡창지대를 뺏기지 않고,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으로 보급의 한계를 강요한 것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2차 고구려-수 전쟁(612)에서 수나라의 우중문,우문술 별동대를 처리하는 방법도 같다. 공세종말점에 처해 굶주리고 지쳐서 퇴각하는 수군을 살수대첩(612)으로 대파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264~BC241)
포에니 전쟁은 총 3차례의 시기가 있다. 1차 전쟁(BC264~BC241), 2차 전쟁(BC219~BC201), 3차 전쟁(BC149~BC146)이다. 로마 공화국은 피로스 전쟁(BC280~BC275)에서 에페이로스 왕국의 피로스 1세에게 '피로스의 승리'를 강요(?)하고, 동맹시들을 회유하면서 자멸하도록 유인해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까지 세를 뻗치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지중해를 두고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고, 그 도화선은 시칠리아의 메사나였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서부를 이미 점령하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동부의 세력을 갖고 있던 시라쿠사의 메사나에서의 분쟁에 개입해 그 지역을 점령했다.(BC264) 로마는 전쟁의 피로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충지가 넘어간 것을 지켜보지는 않았고, 제1차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로마의 육군과 카르타고의 해군의 대결에서 교착되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의 해군을 타파할 실력을 길러냈고, 카르타고의 난파된 갤리선을 복제하고 해군을 신설했다. 이후 '코르부스'라는 가교를 이용해 밀레 해전(BC260)에서 이기고, 로마 시민들의 자원입대로 말미암은 동원력으로 내분에 휩싸인 카르타고를 격파하고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제2차 포에니전쟁(BC218~BC202)
이후 카르타고는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을 겪었고, 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그로 인해 일어난 용병 반란(BC240)을 진압할 때까지 혼란을 겪었다.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를 필두로 스페인 지역의 식민지 경영에 착수했다.(BC228) 로마는 샤르데냐섬과 코르시카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일리리아 해적을 소탕하면서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뒤를 이은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의 동맹국 사군툼을 침공했고, 제2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하게 된다.(BC218) 같은 해 여름에 시칠리아 근방 릴리바이움에서 해전이 있었고 로마가 승리했다. 한니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은 다음 이를 막기위해 마르세유에 상륙한 로마군의 허를 찔러 알프스 산맥을 통해 이탈리아에 진입했다.
알프스 산맥을 거쳐 이탈리아로
알프스 산맥의 석회석, 대리석을 불로 달군 다음 초산으로 녹여 길을 만드는 식으로 산을 내려왔다고 한다. 전투 코끼리도 같이 데려 갔는데 코끼리때문에도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산에 사는 부족들의 공격도 견디면서.(고생이군;;)
알프스를 건넌 후 로마에 적대적인 갈리아 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이탈리아에 진입한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티키누스 전투, 트레비아강 전투(BC218)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격파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진입에 맞물려서 그나이투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삼촌, 아버지는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다.)의 로마군은 히스파니아(스페인)지역으로 간다. 이 지역의 카르타고군을 이기고 스페인 에브로 강 북부에서 입지를 다져 놓는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에 의해 이제부터 로마는 이탈리아 내부에서 꽤나 고생을 하게 된다. 이를 제외하면 히스파니아 지역과 샤르데냐 섬 지역 등에서 로마군은 밀리지 않았다. 결국 어떻게 한니발만 처리하면 유리한 전쟁이었다는 거다. 그러나 또 허를 찌르고 늪지대를 건넌 후 트라시메노호에서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와 로마군은 한니발의 매복에 걸려 그야말로 참패를 하고 만다.(BC217) 이후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시를 공격하면서 캄파니아 지역으로 이동한다.
파비우스의 등장(BC217)
로마는 위기를 맞아 비상시에 선출하는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누스를 선출한다. 파비우스는 전쟁의 전체 전황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전투의 천재 한니발하고만 싸워주지 않으면서 약탈과 보급을 차단하고, 동맹시들이 넘어가지 않게 관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그의 소극적으로 보인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고, 시원스럽게 싸워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질책한다. 한니발은 보란듯이 가는 지역을 약탈하고 학살했고 영리하게도 파비우스의 영지는 건드리지 않았다.
파비우스의 전략이 유효했지만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은 소정의 성과를 거둔 미누키우스와 군권을 나누게 했고, 이후에는 다른 집정관이 군권을 인수하게 된다. 미누키우스가 한니발과 붙다가 위험에 빠진 것을 파비우스가 구해주기도 했다. 반면에 히스파니아 지역에서는 에브로 강을 건너고 카르타고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등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파비우스의 전략
1. 마을을 소개하고 식수, 식량을 모조리 치운다.
2. 한니발의 본대와 절대 대결하지 않는다.
3. 한니발이 없으면 싸운다.
4. 한니발이 떠난 지역은 다시 점령하고 보급부족을 강요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의 교과서 - 칸나이 전투(BC216)
새로 선출된 집정관 바로와 파울루스는 칸나이 회전에서 한니발에게 그야말로 대참패를 하게 된다. 한니발의 진영은 지금도 회자되는 교과서적인 포위섬멸작전, 망치와 모루 전술의 정석이라고 평가된다. 로마군 8만여명 중 반이 사망하고 또 그 반 이상이 전부 포로로 잡혔다.
이 칸나이 전투의 패배 이후 로마의 지배력은 점점 의심을 받게 되어 캄파니아의 카푸아, 시라쿠사, 타라스 지역이 전부 한니발의 편에 붙었으며 입지가 줄어들었다. 한니발은 드디어 본국 카르타고에서 병사와 보급을 지원받았다.(BC214) 여기에 더해 마케도니아마저도카르타고와 동맹을 체결했다. 로마는 아직 동맹시들이 많이 남아있긴 했지만 히스파니아지역의 활약빼고는 이탈리아에서 궁지에 몰려갔다.
시라쿠사와의 전쟁과 혼란한 양상(BC214~BC212)
한니발이 타렌툼(타라스)과 이탈리아 서부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정치가 불안했던 시라쿠사에서 쿠데타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집권하게 된다. 이들은 로마를 모함하고 로마의 동맹시를 약탈했다. 로마는 2년여에 걸쳐 시라쿠사와도 전쟁을 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의 과학 무기와 수학문제를 풀다가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가 이 때의 이야기다. 카르타고의 본국의 군대도 시칠리아에 상륙해 로마군을 위협했고 마케도니아와도 일리리아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운좋게도 시칠리아 지역에서의 전염병 창궐로 로마가 시라쿠사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일리리아 지역의 마케도니아와의 전선도 교착된 상태로 버티고 있었고, 히스파니아 지역에서는 한니발과의 전투 경험이 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활약하며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한니발은 로마에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승장군이었지만 결국 카푸아를 뺏기고 하스드루발의 지원군이 메타우루스 전투(BC207)에서 패배해 고립되버린다.
히스파니아에서부터 시작된 반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북아프리카 튀니지 부근으로 상륙해 우티카 전투와 바그라다스 전투(BC203)로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본토 군을 격파했고, 결국 한니발은 어쩔수없이 카르타고로 복귀하게 된다. 로마군도 한니발에 의해 그의 전매특허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몸으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자마 전투(BC202)에서 한니발과 카르타고 군은 주어진 자원을 활용해 분전했지만 결국 기병 전력의 열세와 숙련병들의 부족으로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의 로마군에게 드디어 패배하고 만다.
제3차 포에니전쟁(BC149~BC146)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뼈까지 발리는 신세가 되며 로마는 카르타고를 철저히 탄압한다. 시간이 흐른 뒤 카르타고인들의 불만이 쌓이고 핍박을 받다가 누미디아의 압박에 허락없이 전쟁할 수 없던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이대론 살 수 없다며 전쟁을 결의한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고 카르타고는 장렬히 멸망하게 된다.
같이보기 : 피로스의 승리 - 피로스 전쟁(BC280~BC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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