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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중 왕당파의 반란, 방데 전쟁(Guerre de Vendée, 1793~1796) 본문
방데 전쟁(Guerre de Vendée, 1793~1796)은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뜨겁던 1793년에 프랑스의 시골 방데에서 농민과 가톨릭 교회세력이 일으킨 봉기 혹은 내전 사건이다. 예전에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에 유래가 없던 사건이었던 만큼 방데 전쟁은 혁명에 대항하는 반동 봉기라고만 이해가 되었다. 지금은 방데 지역에 대한 학살 등으로 인해 비판적인 재평가의 시선 또한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선악과 도덕적 관점을 떠나 당시 방데 지역의 백군이 펄떡거리는 물리적인 에너지의 흐름에 역행해서 그 것과 충돌했다는 거다. 교통사고와도 같다. 고속도로에서 엑셀 페달을 힘껏 밟고 있는 차와 부딪히는 것에 선악은 없다. 선해도 죽고 악해도 죽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선악의 잣대로 본다면 끔찍한 면이 분명히 있다. 후대가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할 실수도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은 역사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근대를 열어젖힌 대사건이었다.
앙시앵레짐의 구조적 모순은 구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섰고, 근대의 구조로 재편되는 과정은 처음가보는 길이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이었다. 그러나 본질은 구조의 건설이다. 여기서 프랑스혁명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 본질과 별개로 어떤 환경에서 인간의 야만적인 모습이 나올수도 있었다.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시행착오의 혼란상이 있었다. 유럽의 각 국은 혁명 중의 프랑스를 침공하고 있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9월 대학살과 루이 16세 처형, 방데 학살, 공포정치 숙청등이 일어났다.
루이 16세 처형과 왕당파의 봉기, 방데 전쟁(1793)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
1793년 1월 단두대에서 루이16세의 목이 잘렸다. 1792년 벌어진 프랑스혁명전쟁에서 그동안의 열세를 극복하고 발미전투(1792. 9월)에 혁명군의 승리로 기세가 올랐지만 대프랑스동맹에 참여하는 국가도 늘게 되었다. 루이 16세 처형에 혁명 정부에 반감을 가진 프랑스 서부의 농민들이 30만 징집령에 반대해 봉기했다. 1793년 3월에 정부 징집관이 방데 지역에 오자 농민 시위가 발생했고,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정부군이 쉽게 진압을 했으나 루아르 강 이남 지역에서는 달랐다고 한다. 숄레 지역에서는 봉기한 청년들이 사령관을 살해했고, 머쉬쿨에서는 수백명의 공화파 시민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사건이 커지자 정부는 서부에 진압군 45,000명을 파견했다. 진압군이 옴에 따라 15,000명의 봉기한 농민들은 방데의 귀족 출신 왕당파 장교들과 합세해 '백군'을 구성했다.
혁명정부와 국민공회의 혁명군(청군)은 모든 반란군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했지만 샹토네, 샬롱쉬르루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백군의 기세는 등등했고 서부 지역에서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했다. 6월에 백군은 낭트 지역을 침공했지만 공화파 시민들의 결사항전으로 실패한다. 그럼에도 백군은 7월동안 다른 지역에서 승승장구했다.
비슷한 시기 5월 파리에서는 지롱드파의 파리코뮌 탄압과 뒤므리에의 쿠데타 시도 실패가 있었다. 격분한 자코뱅파와 상퀼로트들은 봉기를 일으켜 지롱드파를 축출했다. 이에 지롱드파가 많았던 도시인 리옹, 아비뇽, 님즈, 마르세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7월에는 자코뱅 산악파 장 폴 마라가 지롱드파 지지자인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암살당한다.
8월부터는 프랑스혁명전쟁을 경험한 새 진압군이 방데 지역의 백군을 상대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방데의 비극이 시작된다. 비슷한 시기, 9월 툴롱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시작된다. 여기서 나폴레옹이 등장했다. 10월에는 백군이 트랭블레, 숄레 전투에서 패배했고 북쪽 지역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봉기군과 합류하고 영국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11월에 백군의 잔존 세력은 노르망디의 그랑빌을 포위 공격했으나 패했다. 회군과정에서 수천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12월 12일 백군은 르망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청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철수하지 못한 군인과 포로, 민간인 수천명이 루아르 강에 빠져 죽었다. 이후 백군은 와해되었다. 1794년 1월부터 4월까지 방데 지역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약 50,000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암살과 테러로 인한 혼란상에 에베르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득세하고 있었다. 같은 산악파 에베르와 당통도 1794년 3~4월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정도였다.
한번 기울어진 전세는 무참한 학살로 변모했다. 15만~20만의 방데 지역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혁명전쟁을 수행하는 와중 1796년 7월에야 백군의 패배 확정으로 방데 전쟁이 종결되었다.
방데 지역은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한 후에도 봉기를 일으켰다. 왕정복고 후 1830년 7월 혁명으로 시대착오적이고 봉건적인 샤를 10세가 물러났을 때에는 그를 지지하고 부르봉 왕조를 다시 복구하려고 했다. 빈체제에 반발하는 1848년 혁명때에는 어느정도 타협(?)하고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 밀어주었다고 한다. 방데 지역은 지금도 우파 성향이 강한 편이라고 한다. 현재 프랑스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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