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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왕 정유삼흉(丁酉三凶) 김안로의 공포정치와 그의 최후 본문
정유삼흉(丁酉三凶) 김안로(1481~1537)
김안로(1481~1537)는 조선 중종 시기의 권력가다. 아버지와 그의 형제가 사림의 시초인 김종직의 문하였다. 김안로의 고조부는 세도가의 부패를 비판한 김자지다. 그의 출신은 사림쪽에 가까웠다. 20세에 소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25세때에는 별시 문과 장원으로 급제한 엘리트였다. 기묘사화(1519)에 휩쓸려 유배가기도 했으나 중종반정의 공신과 사림파의 사이에서 외척으로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 현재의 검찰, 언론과도 같은 삼사의 사간원, 사헌부를 장악해 공포정치를 휘둘렀다.
그는 자신에게 자잘한 잘못을 범하거나 사소한 실수를 한 이들도 꼼꼼하게(?) 챙겨 무조건 보복을 했으며 대규모 옥사사건을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에게 권력이 집중된 후 그는 부정축재를 일삼았고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치를 보이기도 했다. 이른바 '대윤', '소윤'으로 불리는 인종, 명종의 세력 중 윤임과 함께 인종의 편에서 윤원형, 윤원로 등의 문정왕후 세력과 대립했고,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숙청당한 저주 조작 사건 작서의 변(1527)과 가작인두의 변(1533)도 김안로나 문정왕후의 공작이었다는 설이 있다.
중종은 처음에는 김안로를 밀어주는 행보도 보였으나, 나중에 자신에게도 위해가 될 정도로 권력이 김안로에게 집중되고 신하로서 선넘는 모습을 보이면서 통제가 어려워지자 도승지 양연에게 밀지를 내려 김안로를 실각시키는 여론을 만들었다. 김안로의 수족이었던 사간원, 사헌부의 탄핵으로 유배된 그는 사사되었다. 이 때 김안로와 허항, 채무택이 같이 죽었는데 그들을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부른다.
사화 후 약화된 사림 세력, 훈구 세력을 김안로로 견제한 중종, 외척의 발호
중종은 사실 중종반정(1506)으로 반정공신에 의해 19세때 옹립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훈구 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중전 신씨의 폐위도 방어할 수 없었다. 신하들에 의해 모의된 반정은 명분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후기 행보가 워낙 개차반이어서 정국의 큰 혼란은 없었던 것 같다.
연산군은 초기에는 그래도 성종 치세의 분위기를 유지했으나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를 거치면서 폭군, 독재자가 되어 갔고 입에 담기 힘든 만행들을 저질렀다. 연산군이 훈구 세력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기만 했다면 사실 중종반정은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반정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중종은 강해진 훈구 세력을 조광조를 위시로 한 사림 세력을 기용함으로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사림은 개혁 후의 역설을 고려하지 않은 과격한 행보를 보였고 왕도 도학 정치의 규범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을 가져 중종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기묘사화가 있고 후대의 사림 세력은 조광조가 이루고자 한 방향은 맞았으나 그 방법이 거칠었다는 평가를 했다. 중종은 사림 세력이 자신의 제어에서 벗어나려 하자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입지를 보전하고 강화시켰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 세력이 다시 조정의 주도권을 가져옴으로 중종은 이들을 다룰 다른 견제장치를 필요로 했고, 거기에 부합한 게 김안로였다. 김안로는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로 외척의 지위를 갖고 있었고, 남곤에 의해 유배당했을 때 부마인 아들을 이용해 정계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세력이 없는 자가 권력을 갑자기 획득하게 되는 것은 제동장치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 김안로는 스트레스를 전가할 세력이 없었고, 세력이 없으니 전부 적이었다. 세력이 있어야 자신이 무리한 행보를 할 때 같은 편으로서 누군가가 합리적인 제어를 해줄텐데 그게 없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적을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그러다 갑자기 큰 권력을 갖게 되면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게 공포정치 국면으로 이어졌다.
김안로 및 정유삼흉이 사사된 후 외척의 발호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후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가의 세력이 커져 인종의 짧은 재위기간과 명종 때의 을사사화(1545)로 이어졌다. 김안로가 몰랐던 것은 이 숙청 드라이브는 사실 중종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멈추지 못했고 중종이 적당한 때에 멈춰줬다. 중종도 약한 입지에서 드라이브를 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당시 왕의 숙명이었던 점이 있다. 죽거나 혹은 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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