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백준
- dfs 백트래킹
- 에도 시대 가렴주구
- dfs
- union find
- DP
- 오블완
- LCA
- 파비우스 전략
- 분할정복
- 유니온 파인드
- ccw
- 내란수괴 윤석열
- 내란수괴
- 민주주의
- 티스토리챌린지
- Python
- 투 포인터
- 내란죄
- 재귀함수
- 윤석열
- Prim
- 구조론
- 왈왈왈
- BFS
- 알고리즘
- 다익스트라
- 프림
- 비상계엄
- 이분 탐색
- Today
- Total
Toolofv 님의 블로그
일본의 무기는 매춘으로 만들어졌다,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 본문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의 사전적 의미다. 19세기 후반부터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국가 차원의 취업사기, 인신매매로 팔려서 세계 곳곳의 유곽에서 일하던 매춘부를 칭하는 말이다. 동아시아·동남아시아·만주·러시아·영국령 인도·미국·호주 등지 등으로 한 때 일본 전체 수출 금액의 10%를 벌어다주는 '산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낭자군(娘子軍)'이란 칭호를 얻었고 한 때 애국자로 치켜세워졌다. 일본 1만엔 지폐의 '후쿠자와 유키치'도 칭송했다. 실상은 사기와 인신매매 산업으로 인해 동원된 야만적 범죄였다. 인신매매가 돈이 되니 조직적인 사업이 등장했다. 청일전쟁의 전비를 일본의 매춘부들이 번 돈으로만 충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이들은 '국가의 수치'로 되어 버려졌다.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의 기원
사실 가라유키상의 기원은 그보다 더 이전이다. 에도 시대와 그 이전에도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마비키(まびき)'라는 영아 살해 풍습도 있을 정도였다. 마비키에서 살아남은 여자아이들이 성장하고 매춘을 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무로마치 시대에 일본 타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에게 조총을 구입하고 복제하는 과정에서도 대장장이가 딸들을 바쳐서 제작법을 알아냈다는 일화도 있다.(1543)
이후로도 서양과의 교역 과정에서 총과 화약을 구입하는데 일본의 여성들이 대금으로 대신 지불되어 포르투갈, 인도, 아프리카, 페루 등으로 노예로 팔렸다. 17세기 남미 페루의 인구 조사에 일본인 노예 수십명의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다. 임진왜란(1592~1598) 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종군기자 노릇을 하던 사람의 견문록에는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에도 시대 - 인신매매의 역사 블로그 - https://blog.naver.com/marich77
「크리스찬 영주, 小名, 호족들이, 화약이 탐나면 무리들에게 사냥한 여자들을 서양 선박에 옮겨, 짐승과 같이 묶고 선내에 밀어넣기 때문에, 여자들이 울부짖어, 고함치는 모양이 지옥과 같다」.자비에르는 일본을 유럽의 제국주의에 매도하는 역할을 담당해 유태인으로 마라노(개종 유태인)의 알메이다는, 일본에 화약을 팔아, 교환한 일본 여성을 노예선에 데리고 들어가고 해외에서 팔아 치운 보스중의 보스였다.크리스찬 영주 大友、大村、有馬의 조카들이, 天正少年使節団으로서 로마교황의 아래에 갔지만, 그 보고서를 보면, 크리스찬 영주의 악행이 세계에 이르고 있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가는 곳마다 일본 여성이 어디까지 가도 많이 눈에 띈다.유럽 각지에서 50만이라고 한다.
피부가 희고 얼굴 좋은 일본의 딸들이 秘所 숨김없이 모두 연결되어 가질 수 있게 놀아져 노예등의 나라에까지 전매되어 가는 것을 정시 할 수 없다.쇠로된 사슬에 엮여 동포를 먼 땅에 매도하는 무리들에게의 분노도, 원래 그대로, 백인 문명이면서, 왜 같은 인간을 노예로 한다.포르투갈인의 교회나 師父가 초석(화약의 원료)과 교환해, 인도나 아프리카까지 팔고 있다」라고.일본의 카톨릭교도들(Protestant도 포함할 수 있어)은, 크리스찬 순교자의 비극을 구전한다.그러나, 그 少年使節団이 기록한(50만명의 비극)을, 화약 한통에 50명의 딸이 팔려 간 비극을 어째서 구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가.크리스찬 영주들에게 神杜・仏閣을 불태워진 비극의 역사를 계속 무시하는 것인가.
에도시대 - 인신매매의 역사 | 작성자 marich77 (위 블로그)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의 활동
가라유키상들은 제겐(ぜげん), 핀푸(ピンプ)라는 알선업자들에 의해 조달(?)되었다. 이들은 해외취업을 유인하며 여성들을 포주에게 넘기고 중개수수료를 받았다. 여성의 부모에게 급여를 선지급해주고 외국으로 보냈다. 사업이 돈이 되자 인신매매, 유괴, 납치 등도 성행했다고 한다. 유괴당한 부모들은 법에 호소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들이 해외에서 보내주는 돈이 가계에 보탬이 되고 먹을 입을 하나 덜었다. 경찰들도 이들이 '애국'한다는 생각으로 제지를 하지 않았다.
섬나라의 지리적 무서움이다. 구조를 바꾸기가 어렵다. 그래서 상부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기형적이고 변칙적이더라도 하부 구조의 변경을 통해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바꾸려면 전부 다 바꿔야 한다. 농민봉기인 '잇키(いっき)'가 에도 시대만 해도 3,000번이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 사무라이는 무기를 가지고 있고 농민들에게 총은 쥐어져 있지 않았다. 도망갈 대륙이 없었다.
외국으로 간 가라유키상들은 부모가 받은 선금, 각종 수수료, 교통비, 건강검진비 등으로 인해 올가미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적응해 돈을 벌거나 아니면 자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들이 보내진 곳은 중국, 홍콩, 필리핀, 보르네오섬, 타이, 인도네시아 등이었다. 주로 항구 도시에 유곽이 설치되었다. 이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일본 제국은 무기를 샀다. 1920년대까지 가라유키상 약 50만명이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한국에 끼친 영향은 뭘까?
일본이 일제 강점기 시절 동원한 한국의 위안부나 강제동원을 인정하지 않고 쉬쉬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육, 해군의 '번' 대립을 봐도 그렇지만 아직도 국민에 대한 관점이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상하구조가 엄격하고 각자의 구역을 침범하면 안된다. 그런데 한국의 위안부와 강제동원을 인정하면 자국민에 대한 수탈과 강도짓도 인정을 해야 된다. 그러다 보면 계속 밀린다고 보는 거다.
한국도 박정희 시절 미군에 대한 매춘업으로 정부 차원에서 체계화해 달러를 벌어들였던 과거가 있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양공주'라고 불렀고, 정부를 등에 엎고 인신매매 범죄를 통한 유입도 있었다. '몽키하우스'로 불리는 성병관리소를 만들어 관리하면서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여성보다는 미군 내에서 퍼지고 있던 성병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2022년 대법원은 정부가 1950년대부터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조장하고 운영에 관여한 점을 인정해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영아 살해 풍습, 마비키(まびき) (1) | 2025.01.21 |
---|---|
조면기의 역설과 서울의 리어카 (2) | 2025.01.15 |
민주주의는 '-ism'이 아니라 'Democracy'다. (1) | 2025.01.12 |
복수왕 정유삼흉(丁酉三凶) 김안로의 공포정치와 그의 최후 (1) | 2025.01.06 |
프랑스혁명 중 왕당파의 반란, 방데 전쟁(Guerre de Vendée, 1793~1796) (3) | 202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