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유니온 파인드
- 비상계엄
- 구조론
- union find
- 내란수괴 윤석열
- 백준
- 다익스트라
- 티스토리챌린지
- 알고리즘
- 이분 탐색
- 투 포인터
- 에도 시대 가렴주구
- 오블완
- BFS
- 내란죄
- Python
- 재귀함수
- 민주주의
- LCA
- dfs
- 파비우스 전략
- Prim
- 프림
- 내란수괴
- 분할정복
- ccw
- 윤석열
- dfs 백트래킹
- DP
- 왈왈왈
- Today
- Total
Toolofv 님의 블로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1450년경) 본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68)가 만든 금속활자와 활판인쇄술은 세계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인쇄물의 공장식 생산은 장기적으로는 학문의 발전과 전파의 기반이 되었다. 그전에도 목판인쇄술이 있었으나 효과적이지 못했다. 책을 보는 독자층도 귀족층에 한정되어 주로 필사를 하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95개조 반박문(1517)은 독일어 문자로 인쇄되어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자가 민중에게도 보급되었다.
당시 사회의 지식 수준은 문자와 인쇄술 보급으로 인한 정보의 빠른 전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녀사냥 지침서인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같은 책이 인쇄되어 퍼지기도 했다. 문자와 인쇄술은 있었지만 지식은 보급되지 못했던 거다. 그로 인해 유럽이 마녀사냥의 홍역을 치뤘다. 물론 구텐베르크의 잘못은 아니다. 도구는 잘못이 없다. 그걸 사용하는 사람과 사회의 문제점이 증폭되어 드러났다. 미국 일라이 휘트니의 조면기(1793) 역설과 비슷하다.
조면기의 역설과 서울 리어카 포스팅
금속활자는 누가 먼저 만들었나?
금속활자는 한국이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었다. 고려 우왕 시기 <직지심체요절(1377)>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여몽전쟁(1231~1259) 중 최우가 집권하던 시기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가 '증도가자'라는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아직 공인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로 와서 보더라도 태종 때 주자소(1403)를 만들어 제작한 '정해자(1407)'라는 금속활자가 빠르긴 했다. 세종대왕 시기에는 더 발전된 '갑인자(1434)'가 만들어졌다. 이도 구텐베르크의 1447년 무렵의 금속활자 제작보다 빠르다. 그런데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활용한 활판인쇄기술까지 만들었다는 점이 남다르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기술도 한국과 달랐다. 철로 된 양각으로 글자가 안으로 들어간 음각을 만들고 거푸집에 납, 안티모니, 주석 합금을 부어 활자를 만들었다. 활자가 손상됐다 싶으면 녹여서 재생시킬 수 있었다.
금속 활자를 한국이 먼저 만들었으나 구텐베르크의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것은 기반이 되는 문자의 차이가 컸다. 또 구리의 확보가 어려웠던 점도 있다. 활자를 쓰면서 얻을 효율이 안보였기 때문에 투자 심리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한자를 위주로 사용했는데 이를 활자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컸던 것이다. 한글이 그나마 낫다고 해도 역시 알파벳에 비해 양이 현저하게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에 대한 경향신문 기사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개발사
구텐베르크의 아버지는 조폐국에서 화폐 주조 업무를 맡고 있었다. 야금에 대한 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구텐베르크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1429년에 마인츠에서 현재 프랑스 지역인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하고 사업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곳 법원의 재판기록에 구텐베르크가 출자자를 모아 인쇄업을 했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1448년경에 다시 마인츠로 돌아와서 인쇄기 개발에 몰두했는데 자금 부족을 겪어 금세공사였던 푸스트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게 된다. 그래서 인쇄소를 일종의 동업 형태로 차렸다고 한다. 인쇄기를 개발하고 품질에 대한 인정을 받아 교회의 면벌부 인쇄를 맡는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에서 착안해 성경 출판을 하기로 한다. 당시 성경의 가격은 일반 사람들의 집보다도 비싼 가격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이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아 대박을 쳤다.
이제 돈을 좀 만져보나 싶었지만 채권자 푸스트가 발목을 잡았다. 푸스트는 구텐베르크에게 빌려준 돈에 대한 원금반환 소송을 제기했고, 구텐베르크는 푸스트에게 전재산을 물어줘야만 했다. 그는 다시 재기해 인쇄업을 하면서 라틴어 사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래도 인쇄술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나사우의 대주교 아돌프 2세에게 연금을 받으면서 꽤 잘 살았다고 한다. 구텐베르크는 1468년에 70여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와 같이 인쇄업을 하면서 일했던 직원들이 유럽 각지로 가면서 인쇄술이 퍼지게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활자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3단 구조다. 철로 된 양각이란 글자가 튀어나온 틀을 만들고 이것을 구리판에 눌러 글자가 들어간 음각을 만들었다. 다시 철로 만들어져 있는 주조판에 음각을 넣고 납, 안티모니, 주석 합금을 부어 활자를 만들었다. 활자는 요철로 되어 있어 활자끼리 꽉 맞물릴 수 있었다.
여기에 포도주 기름을 짜던 압축기를 활용해 꽉 눌러 활판과 고정된 종이에 압력을 가했다. 현재 언론은 Press라 칭하는데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인쇄기로 대량 인쇄를 손쉽게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삽화가 필요할 때는 필사로 추가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술이 사용되면서 이전 1,000년동안 만든 책보다 더 많은 책을 단시간에 만들 수 있었다.
현대에는 대량 인쇄의 경우 오프셋 인쇄기를 사용해 출력하고 제본을 한다. 소량 인쇄의 경우 디지털 프린터를 사용한다. 구텐베르크 시절에 비하면 몇 백배에서 몇 천배가 되는 효율이다. 그렇지만 구텐베르크의 이름이 남은 것은 그가 인쇄술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제사(祭祀)와 차례(茶禮), 이젠 없어져야 한다. (3) | 2025.01.25 |
---|---|
일본, 자유로운(?) 성문화의 기원, 요바이(よばい) (1) | 2025.01.23 |
김동렬의 구조론 연구소(1999~) (0) | 2025.01.22 |
일본 제국의 무기는 매춘으로 만들어졌다,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 (1) | 2025.01.21 |
일본의 영아 살해 풍습, 마비키(まびき) (1) | 2025.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