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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독일 농민전쟁(Deutscher Bauernkrieg, 1524~1526) 본문
16세기에 현재 독일 지역을 포함한 유럽의 봉건 구조는 흔들리고 있었다. 소빙하기의 추운 날씨는 농작물의 생산량을 낮추고 있었다. 문자 해석의 독점과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와 같은 부패는 낮아진 생산력과 전염병, 팍팍한 삶과 맞물려 당시 사람들의 불만을 키웠다. 기존의 권력 구도에 대한 불신이 계속 싹트고 있었다.
신대륙 발견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한 스페인은 결혼 동맹을 통해 입지를 넓혀가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합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1519~1556)는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프랑스와의 파비아전투(1525)에서 대승리를 했다. 화승총과 화약이 신무기로 궤도에 올라 쓰여지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스위스 용병으로 대표되는 용병들은 몰락해갔다.
당시 독일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지방자치가 보장되고 중앙과 분권화되어있는 봉건적인 영방국가였다. 귀족들이 자기 구역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은 하층민들이 그만큼 매우 힘들었다는 말과 같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1450년경)이 도입되면서 인쇄혁명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1517)'과 독일어 문자로 쓰여진 성경을 출판했고 인쇄의 혁신에 맞물려 독일어 문자가 민중에게 보급되었다.
얀 후스를 따르는 후스파와 교황을 추종하는 제후국과의 싸움인 후스 전쟁(1419~1434)이 루터보다 전에도 있던 것을 보면 마르틴 루터가 역사에 대대적으로 기록된 것은 종교개혁의 폭발이라기보다는 소빙하기와 인쇄술과 문자의 보급, 발달하고 있는 새로운 무기가 맞물려 이뤄진 더 큰 차원의 변화에 속하는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독일 농민전쟁(Deutscher Bauernkrieg, 1524~1526)
카를 5세가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고 독일로 떠난 후 스페인 지역에서도 1520년부터 1521년까지 1년반에 걸친 기간동안 대대적인 농민 반란이 있었다. 신대륙 발견을 통한 탐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고 지중해에는 바르바리 해적들이 들끓었다. 기저의 구조 변화로 사회는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였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훨씬 이전에 왕이 귀족을 견제하느라 농노제를 폐지해버렸다.
이런 때에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것이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독일로 활발하게 퍼지면서 봉건제 하의 농노, 농민들이 일어났다. 사실 루터는 자신의 가톨릭 교회 비판이 이렇게 발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카를 5세의 탄압을 피해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고 있던 입장인 것도 있지만 들고일어난 농민들을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들이라고 매도했다. 루터는 농민은 농업에 힘쓰고 지도층은 사회 안정을 위해 일하면 된다는 하나마나한 말을 했다.
이에 농민들은 토마스 뮌처(1489~1525)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슈바벤을 거점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동원된 농민군은 사실 농민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고 여러 직업군이 참여했다. 몰락한 강도 기사 괴츠 폰 베를리힝엔부터 끗발떨어지는 귀족들도 있었다. 10만명에서 30만명까지의 농민군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농민들은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해서 요구사항이 있나싶은 '12규약'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활동했다.

농민군은 연대 - 하연대 - 중대 - 분대 방식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고 링(ring)이라는 행정 기구로 원형으로 모여앉아 의사결정을 하는 민주적 회의체를 가졌었다고 한다.(몽골의 쿠릴타이와 비슷한 듯 싶다. 민주적 회의체에 대해서는 스페인 내전의 교훈으로 인한 잘못된 통념이 있는 것 같다. 스페인 내전은 인민전선에 총이 보급되지 않아서 진 것이다.)
냉병기, 핸드캐논, 아르케부스(화승총), 대포로 무장했고 후스 전쟁의 이동식요새 바겐부르크도 만들었다. 화약이 부족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기병전력은 없었다. 농민군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귀족 연합군인 슈바벤 동맹군과 용병 란츠크네히트에게 결국 진압을 당했다. 라이프하임에서 협상을 한답시고 유인당했다고 한다. 협상 파기후 전투가 벌어졌지만 슈바벤 동맹군의 기병대에 휩쓸렸다.
패전의 이유는 총이 아직 불완전한 시기였던 게 컸다고 본다. 총기가 등장은 했지만 기병을 이길만큼 아직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에 프랑스혁명(1789~1794)은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털어 화약을 확보하니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독일 농민전쟁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전쟁의 결과로 공식적으로만 7만명의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한다. 후대에 와서야 이 사건이 주목되었다. 엥겔스가 그들의 항쟁을 위대한 혁명적 시도라고 인정했다. 당시 농민군의 '12규약'은 1848년에 독일의 3월 혁명에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1. 우리 농민 자치지역(코뮌)내의 성직자의 임명권은 우리에게 있으며 그 성직자들이 옳지 못한 짓을 하면 우리는 그를 파직시킬 권리가 있다. 성직자는 아무런 조건없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성직자들은 성경에 대해 추가적으로 이상한 해석을 붙이는 것이 아닌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오직 성경과 참된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왕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십일조는 오직 큰 십일조(성경에서 나오는 십일조)만을 내며 그 외의 작은 십일조들(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가 아닌 영주들, 교권측에서 따로 만든 십일조. 즉 삥뜯는 용)은 사라져야 한다. 왜냐면 그 것은 후대의 인간들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가축들은 모두 인간의 것이라고 말씀하였고 그분께서는 우리들에게 '값'을 받지 않기로 하셨다.
3. 하느님께서는 귀족들의 의해 자신의 피로써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그런 해방인들이 다른 동포를 노예로(농노로)삼는 것을 그 분이 허락하신 적이 있는가? 우리는 성경에 따라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한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4. 가난한 이들은 사냥도, 어업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의 생각인가? 이들이 참을성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자들이라고 보는가? 하느님은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없다. 또한 그런 생각은 '형제'로써 할 생각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새, 물고기, 동물의 대한 권리와 권세를 인간에게 기부하셨다.
5. 귀족들은 언제나 숲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이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면 그들은 그 것을 두배의 값을 주며 사야 했다. 이는 옳지 못하며 팔리지 않은 목재들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여 건설, 건축 혹은 장작 등으로 쓸 수 있게, 즉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맞게 쓸 수 있게 반환되어야 한다.
6. 날마다 강제노동이 과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노동의 양은 줄어야 한다.
7. 귀족은 우리들이 정한 노동량을 강제로 늘리면 안된다.
8. 모든 밭에서 필요한 만큼의(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소작료(임대료)를 낼 수 없다. 정직한 이들이 땅을 조사하여 불필요한 임대료를 없애 농민들이 착취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9. 그대들은 신성모독에 의한 벌금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법을 만들어 왔다. 그들은 죄의 유무가 아닌 그들의 이익만을 고려하여 거짓으로써 처벌을 내렸다.(당시 영주와 같은 기득권층은 농노들을 상대로 재판에서 본래보다 높은 벌금을 매기기도 하였다.) 이것이 옳은 처벌이라고 보는가? 우리는 정당한 처벌을 받기 위해서 오래된 옛 법률(즉 성경)에 따라 정당하게 판단되어 처벌받아야 함을 주장한다.
10. 본래 농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경작지들이 영지들에게 강제로 할당되었다. 우리는 할당(사실상 강탈)당한 경작지들을 다시금 반환받고 싶다.
11. 죽음세(Todfall. 일종의 상속세. 그러나 당시 가난했던 농민들에게 있어서 상속세는 현대와 꽤나 다른 의미를 지님)를 면제하라. 더이상 과부와 고아들이 하느님이 주신 명예에 반하여 그들에게 수치스럽게 강탈당하지 않게 하라.
12.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결정이다. 하느님 말씀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우리는 해당되는 규약을 삭제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이 규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른 누군가가 이 조약에 대해 불만사항을 품는다면 수정할 수 있음을 조건으로 걸 것이다.
독일 농민전쟁(1524~1526) 당시 12규약(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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