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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가 불붙인 '종교개혁(1517)'이라는 이름의 개혁 본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1517)을 시작으로 독일과 유럽에서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이 소용돌이 안에서 루터파·칼뱅파·성공회 등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생겼다. 구교 가톨릭의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는 북유럽, 대체로 당시 북부독일지역에서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탈리아와 먼 쪽은 개신교를 받아들였다고 봐도 될 듯 하다. 바이에른 등 남부 독일에서는 가톨릭이 강했다. 여기에는 종교적 신념보다는 지정학과 그에 따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 마르틴 루터라는 개인이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기보다는 역사의 방향이 바뀌는 전환점에 서있던 게 마르틴 루터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요한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1450년경)이 기반이 되어 독일어권에서 루터의 사상이 활발하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주요 도시 300곳에 3,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 루터가 라틴어로 되어있는 반박문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도 한 몫 했다. 북독일어와 남독일어의 차이를 두 언어에 정통한 루터가 메웠다. 반박문은 기존 가톨릭의 과도한 면벌부 판매에 대한 비판이었는데 내용을 떠나서 형식적으로 이는 결과적으로 독일어권 통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독일어 문학 및 독일어권의 민족주의 통합에도 영향을 끼쳤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1450년경)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68)가 만든 금속활자와 활판인쇄술은 세계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인쇄물의 공장식 생산은 장기적으로는 학문의 발전과 전파의 기반이 되었다. 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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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1450년경)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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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 교회 바닥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영방국가로 여러 봉건 제후국들의 연합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 시기(1194~1250)부터 제후국, 즉 귀족의 권한은 커졌고 황제의 권한은 추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토대에서 신대륙 발견부터 경력이 화려했던 카를 5세(1519~1556)가 황제이던 종교개혁 시기에도 각 제후국은 이해관계에 따라 신교를 받아들이거나 구교에 붙을 수 있었다. 또 귀족의 입김이 쎈 분위기에서 농노들은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한 판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탈리아 등지의 르네상스도 한 몫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수도원 등 많은 자산을 갖고 있었다. 당시 독일 토지의 1/3을 교회나 수도원이 보유하고 있었다. 루터파를 비롯한 신교쪽이 인정받는다면 귀족들은 당연히 신교쪽에 붙는 것이 남는 장사인 상황이었다. 우후죽순 구교의 탄압(?)에 저항하는 도시들이 늘어났다. 슈말칼덴 동맹이다. 루터가 불을 붙이긴 했는데 불이 붙어가는 모양새는 그의 예상밖이었다. 루터가 말한 내용의 개혁보다는 불이 번져가면서 구조의 문제가 드러나는 쪽으로 진행이 되어갔다.
가톨릭과 기존 구조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신교가 명분이 되었다. 각자의 입장에서 신교라는 신입이 들어옴으로 이 것을 어떻게 이용할까하는 이해관계가 엮여 들어갔다. 루터가 쓴 반박문도 사실 그렇게 급진적이진 않았다. 종교개혁은 커녕 가톨릭의 범위 안에서 제대로 토론해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가톨릭의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설득해 이러한 주장을 철회시키려 했지만 루터는 결국 거부했다. 루터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1521)에서 카를 5세에 의해 파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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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독일어 보급과 문자 해석 독점의 해체
라틴어로 쓰여져 있는 성경을 농민이나 공부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이 뭘 알았겠는가? 그냥 성직자나 글자 아는 사람들이 말하면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루터가 독일어 문자로 쓰여진 성경을 보급하면서 그들의 문자해석의 독점권이 해체된 거다. 루터의 신·구약성경 독일어판은 무려 5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당시의 성경 가격은 학교 교사의 두달치 월급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독일 가정의 20%가 이를 구매했다.
이는 독일 지역의 봉건 구조를 변혁시킬 동력이 되었다. 단기적으로는 기존 구조와 부딪히면서 독일농민전쟁(1524~1526), 슈말칼덴 전쟁(1546~1552), 전 유럽이 휩쓸려 들어간 30년 전쟁(1618~1648)으로 진행했다. 옆의 프랑스도 위그노 전쟁(1562~1599)으로 홍역을 앓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독일어권의 통합의 기반을 마련했다. 근대 국가의 출현의 배경이 된 거다. 또 박터지게 싸우던 게 유럽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역설적인 토대가 되었다.
루터는 파면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러한 입장때문이었는지 독일 농민전쟁을 통한 농노들의 봉기를 두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원래 신분제에 기초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루터의 신의 왕국과 세속적 왕국이 있다는 두 왕국론은 그가 세상을 뒤집을 의도는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말한 비판과 사상은 더 큰 구조의 문제에 일어난 불길에 휩싸여갔다. 그리고 이제 그도 어쩔 수 없어진 것이다. 어쨌든 불은 붙었고 세상은 세상 나름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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