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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6. 25. 전쟁의 영웅 - 김홍일 장군과 한강 방어선 전투 참전용사들 본문
6. 25. 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폭풍 224'라는 암호명을 가진 사전 계획에 따라 남한에 기습남침했다.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한 일본을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한국이 재건되는 시기였다. 당시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서둘러 전공을 올리고자 하였고, 이는 한반도의 38도선(지금의 휴전선과 조금 다르다.)을 선으로 긋게 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한과 북한 지역을 임시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전후 일본군 처리 등을 하면서 협상을 하였으나 결렬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2차 국공내전(1946 ~ 1949)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미국은 1949년에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했고, 애치슨 라인을 그었다(미군정의 실패는 대구 10월항쟁, 제주 4.3사건에 큰 영향을 준다.). 이는 북한의 김일성에게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란 신호를 주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을 71차례 이상의 설득하였고, 소련과 중국은 남한 침공을 지원하기로 한다. (스탈린의 소련은 사실 한반도보다는 동유럽 쪽에 시선이 가있었던 듯 하다.)
어쨌든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전, 대규모 북한군의 38선 집결이란 보고를 받았음에도 국군은 마침 그 시기 공교롭게도 대규모 출타를 하고, 전방부대 주요 장교들이 댄스 파티를 가는 등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매우 안이한 상황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지형이 전차를 운용하는 데에 그렇게 효율적이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T34 전차는 전쟁 초반 경이로운 진격 속도를 보여주었다. 남한은 이승만의 북진 블러핑 영향인지 전차도 없고, 대전차용 무기가 너무 부족한 상황이었다. 전차의 진격을 병사나 지휘관이 수류탄들고서 전사하면서 막았다. 북한은 옹진반도, 개성-문산,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정동진-임원진 방면으로 침공해왔다. 남한군은 전 방면에서 밀리고 낙동산방어선까지 뒤로 밀리게 되는데, 여기에서 김종오 장군과 6사단의 "춘천-홍천 전투"와 김홍일 장군과 개별적으로 퇴각하던 군인들을 모아 구성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한강 방어선 전투"가 빛을 발하게 된다.
한강 방어선 전투
북한군은 서울 방면을 침공하면서 남한군이 뒤로 몰리는 과정에 춘천-홍천 방면의 군으로 먼저 뒤를 선점해 공격하고자 했다. 2차 세계대전때 독일의 낫질 작전을 참고한 것 같다. 김종오 장군과 6사단의 활약으로 "춘천-홍천 전투"에서 약 3일동안의 지연을 당하고 그 계획은 일단 틀어지게 된다. 이어 만주지역 독립운동, 러시아내전, 중국 국민당의 북벌, 윤봉길 의사-이봉창 의사 의거, 중일전쟁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김홍일 장군이 퇴각하던 군인들을 규합해서 지연전을 펼쳐 7일동안의 시간을 벌여주게 된다. 퇴각 병력을 규합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도 의문인데, 초반 이들이 벌어준 시간은 이후의 전쟁구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냥 밀렸다면 유엔의 결의고 뭐고 그냥 북한에 의해 통일되는 상황이었다. 사이즈가 나오니까 유엔군이 투입된 것이다.
한강을 도하하는 과정에서 체계없이 지휘관도 계급장을 떼고 개별적으로 무분별하게 퇴각하는 군인들을 결집시키는 데, 김홍일 장군이 큰 역할을 했다. 1사단 병력들이 파주지역에서 꽤 선전했다고 했지만, 퇴각도 방법이 있는데 그 것을 지휘할 체계가 무너졌다. 김홍일 장군은 북한군 전차의 창경원 침입 통보를 들은 후, 백선엽 장군에게 수색과 행주에 공병대를 파견해 보병들이 통과할 부교를 가설할 것을 권고했지만, 백선엽 장군은 육본의 명령이 아니라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다음에 이 사단이 벌어진 측면이 있는 것같다. 물론 그렇게 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장면은 아닐 수도 있고,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데 김홍일 장군은 회고록에서 그 때 좀 답답했다고 한다.
전황은 심각해졌고, 6개 사단이 철수하기 전에 6월 28일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만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대전에 있었고, 라디오로 국민들이 받아들이기에 오해가 있을만한 말을 하였고, 피난을 권고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김홍일 장군이 채병덕 총참모장을 찾아가 설득(?)한 후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구축하게 된다. 휘하 병력이나 조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퇴각 병력들을 수습해 3개 사단으로 구축했고, 심지어 조직적인 편제와 전투를 해내게 된다. 퇴각 부대들은 김홍일 장군의 사령부가 지휘하면서 전투 시 견실한 사격 통제, 정확도 등이 우수해졌다는 소련 장교의 평가가 있다.
김포지구에서 팔로군 출신 방호산의 북한 6사단은 오류동-소사 방면으로 공격해왔고, 북한 4사단은 난지도, 증산동 방면으로 한강을 도하해 측면을 위협했다. 또 여의도비행장, 서빙고 지역으로도 진격을 해왔다. 북한군의 도하 시도를 7월 2일까지 저지했고, 여의도지역은 북한군이 한강철교를 수리함에 따라 퇴각할 때까지 지켰다.
이후, 첫 투입된 유엔군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에게 첫 패배를 당했고, 미국도 꽤 긴장을 타게 되는데 방어선 전투를 치뤘던 군인들이 잘 싸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의 양상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의 활약과 더불어, 김홍일 장군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휘하 병력들의 지연전이 빛을 발해 유엔군의 투입과 낙동강방어선의 구축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황이 역전되는 발판이 마련되었고, 압록강 일대까지 남한군이 반대로 진격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황은 역전되었고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작전 등의 퇴각 작전을 거쳐 현리 전투같은 졸전도 있었지만, 지평리 전투 등에서의 반전으로 두 세력 모두 공세종말점으로 점차 균형점을 찾아간다. 지난한 휴전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자 휴전선 근처의 여러 전투들이 있었다. 전쟁전에도 수많은 학살사건들이 있었고, 전후에도 이 트라우마는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사건들로 등장했다. 그 피가 흐르고 난 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곳이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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