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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프랑스의 사법농단 드레퓌스 사건(1894) 본문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국때의 대표적인 사법농단 사건이다. 당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여파로 독일에 대한 프랑스인의 감정은 상당히 격화되어있던 때였다. 마치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했다고 보면 비슷할지 모르겠다. 이러한 과정에 프랑스는 2차대전 후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처럼 내부에서 쪼이는 닭을 만들게 되었고, 여기에 유대인 드레퓌스가 걸렸다(1894).
드레퓌스는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를 독일에 유출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별다른 증거도 없이 유죄판결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프랑스령 기아나 악마섬이란 곳에 유배되었다. 수사 당시 증거를 보여달라는 드레퓌스에게 수사관은 아무 연유없이 권총 자살을 권유하는 막장을 보였다. 재판에서 나온 증거는 비슷하다고 인정될 수 없는 필적증거가 다였다.(한국에도 비슷하게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있다.(1991))
1896년에 참모본부 정보국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우연한 발견을 통해 이 사건이 잘못되었음을 알았고, 재심을 요구했으나 그는 좌천되고, 이후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당하기까지 한다. 보고를 받고 사건을 묻어버리려 했던 앙리 소령이 정보국을 장악하게 되었다.(어디서 많이 봤는데..;;)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보고를 접한 드레퓌스의 가족은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그는 무죄방면된다.(1898)
이후 프랑스는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로 나뉘어 내전을 방불케 하는 갈등을 겪는다. 사건은 에밀 졸라가 "로로르"지에 게재한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나는 고발한다.>로 인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그도 이 일로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라는 명목으로 유죄를 받고, 런던으로 망명하게 되었지만, 그가 살린 불씨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은 이미 프랑스 내부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결국 국제적 압력에 밀려 재심이 열리게 된다.(당시 정국이 혼란스럽긴 했던 게 드레퓌스사건(9월)이 벌어진 해 6월에 대통령 사디 카르노 암살사건도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이후 대통령, 총리도 사임한다.)
당시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언론의 편파보도, 가짜뉴스가 극에 달해 있었으며, 이는 왕당파, 보수가톨릭 등의 보수 세력의 증오를 증폭했다. 이들은 '군은 절대 무오류의 조직'이란 주장까지 했고, 진범인 간첩 에스테라지 소령을 영웅시하기도 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극우화, 야만화로 치닫던 분위기에서 지식인 에밀 졸라가 나섰던 것이다. 그는 이후 1902년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의문사를 당하고 만다.
그러다 피카르 중령의 보고를 묵살했던 앙리 중령이 조작한 증거가 밝혀질 위기에 처하자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에스테라지 소령도 영국으로 도망가고 만다. 재심 재판은 1899년에 열렸고, 기존의 1894년 재판이 무효가 되었다. 모든 게 정리되는 듯 했으나, 군부와 법원은 증거날조와 위증, 짜여진 재판을 했다. 재심을 했음에도 10년형이라는 판결을 내려, 다시 프랑스 전역에 불길에 휩싸인다. 권위적인 군부와 법원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드레퓌스가 유죄는 맞는데 사면하는 것으로 마무리짓자고 하였다.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했던 진보적인 세력은 말도 안된다고 질타했으나, 그만 드레퓌스가 이를 받아들이고 만다. 그는 이미 5년간의 수감생활을 한 상태였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드레퓌스 본인은 재심 요구파에게 자신이 자백하기 전에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고. 재심 요구파는 드레퓌스 개인만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는데, 드레퓌스는 그렇지 않았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다. 1904년에 그래도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를 받게 된다. 드레퓌스와 피카르 중령은 복권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이를 사과했다.(1906) 이로써 길었던 사건이 일단락이 된다. 100년 후 1995년에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사과한다.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시오니즘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유대인이었던 테오도르 헤르츨은 이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이 사건의 과정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혁명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모습과 달랐던 것이다. 이후, 헤르츨은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건국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보면 이 것은 유대인 집단이 헤르츨의 시오니즘을 택한 것이기에 꼭 그가 아니었더라도 어느 정도 벌어질 일이었던 측면이 있다. 이후, 이스라엘은 현재 극우 파시즘 국가가 되어버렸다.
한국의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1991)과 굉장히 흡사하다. 드레퓌스 사건과 마찬가지로 유서 필적에 대한 감정의 조작문제가 불거졌으며 법원은 쟁점이었던 필적에 대한 판단을 감정인의 의견대로 판결해버렸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재조명되어 국과수가 다시 한번 감정을 하게 되었고, 사건은 완전히 뒤집혀 재심을 통해 무죄가 최종 확정되었다.(2007) 재판하느라 보낸 시간과 더불어 형기까지 마친 뒤였다. 첫번째 판단을 했던 감정인은 다른 사건에서 석연치 않은 무혐의처리와 무죄를 받기도 한다.
프랑스는 드레퓌스사건으로 양분되어 첨예한 갈등을 겪었다. 드레퓌스는 이미 5년의 형기를 마쳤지만, 원래 그래야 했던 대로 무죄를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공기는 험악했고, 드레퓌스라는 제물이 살아서 돌아오니, 이 험악한 공기는 빠져나가지 못해 반유대주의나 폭력이 더욱 발호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렇다면 드레퓌스는 죄인이 되어 죽는 게 옳았을까? 현실적으로 프랑스의 국민들(보수세력만이겠지만.)이 화가 났고, 쪼이는 닭을 발굴했고, 실제로는 그는 죄가 없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를 제물삼기로 깊은 부분의 의식에서 결정한 것이니 말이다. 그가 안 죽으면 그 에너지는 갈 곳을 잃고 또다른 희생양을 찾아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위 물음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현실로 봐서 단기적인 대응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야만적인 공기의 잘못이고, 그 잘못을 단기적인 대응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고 해도 더 소중한 미래 가치를 팔아넘길 수 없는 경우에 속한다. 왜냐하면 드레퓌스가 죽어주면 그 사회는 앞으로도 그런 사회가 되기로 한 것이고, 범죄자의 협박이 먹히는 사회가 되고 어차피 그런 사회라면 사람이 죽고, 망하기 때문이다. 드레퓌스가 무죄를 외쳐서 다른 사람이 죽게 되더라도, 그 것은 드레퓌스의 잘못이 아닐 뿐더러 역사적으로도 결국은 거치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다. 결국 미래의 사람을 살리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렇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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