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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 -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1955) 본문
미국의 남북전쟁(1861 ~ 1865)은 북부주와 남부주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산업화된 북부주에 1848년의 유럽 혁명에 따른 독일, 아일랜드 등의이주 노동자가 유입되면서 인구가 늘었고, 새로운 주들도 편입됨에 노예제를 통한 대규모 농업을 하던 귀족 사회 남부주와의 위태로운 공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1861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북부표만으로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는 이에 불복하고 전쟁이 일으키게 된다.
4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결국 북부의 연방 정부가 승리를 거뒀다. 북부군이 남부에 주둔하면서 군정을 할 때만 해도 흑인 노예가 해방되어 드디어 흑인의 인권이 향상하는 듯 보였으나, 이후 러더퍼드 B. 헤이스의 대통령 당선 후, 남부는 1877년의 타협으로 북부군이 철수하자마자 그 전으로 회귀해버리고 만다. 남부 백인들의 전후 분노는 KKK단의 테러로 분출되었으며, 흑인들은 각종 린치와 차별을 당한다.
짐크로법, 로자 파크스 사건으로 불이 붙다.
당시 남부의 흑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어떻게든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치졸한 방해공작을 하였고, 총격사건이나 폭탄테러까지 일으켜 수많은 흑인들이 죽기도 했다. 이 야만의 공간과 시간에, 남부 11개주 '짐크로 법(1876~1965)'이라 불리는 흑인과 백인의 공공시설 분리법안이 생기게 되었고, 189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로 흑백분리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앨리배마 주의 몽고메리에서는 1900년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의 시발점이 되는 인종차별의 도시 법령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 법의 내용은 버스의 좌석을 인종으로 분리하는 법안이었는데 '흑인은 버스기사가 되지 못한다'라는 조항, 좌석이 다 찼을 시 자리에 앉은 '흑인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는 불합리한 조항이 있었다.
이런 와중, 기존의 판결과는 다르게 미국 연방대법원은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의 최종 판결(1954)을 하였으며, 미국은 드디어 인종을 이유로 한 분리,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례를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구호가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합리적인 생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백인들이 이용하는 공공시설과 흑인들이 이용하는 시설의 질이 매우 차이가 났고, 흑인들은 인도를 걷다가도 백인이 건너편에서 오고 있으면 차도로 내려가서 걸어야 했다고 한다.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말은 조지 오웰 「동물농장」의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말을 보는 것 같다….
로자 파크스의 사건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클로뎃 콜빈이라는 흑인 여자 아이가 백인에게 버스 좌석 양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체포당한 사건이 있었다. 또 미시시피 주의 에밋 틸이라는 소년이 백인에게 고문받고 살해되는 사건도 일어나 공기는 험악해질대로 험악해진 상태였고, 도화선에 불이 붙기 직전이었다. 이 사건 후, 로자 파크스도 업무를 마치고 클리블랜드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버스가 만석인 상황에서 백인에게 좌석 양보를 강요를 받게 된다. 로자 파크스는 이를 거부했고, 역시 경찰에게 체포당하게 된다. 로자 파크스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비폭력 시민불복종’을 실천했다. 일상에 찾아온 큰 단위의 의사결정의 순간에 당당한 한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녀는 고독한 인간선언을 했다.
나는 내가 피곤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불공정한 대우에 더이상 굴복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입니다.
···
내가 한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내가 해야할 일을 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로자 파크스가 체포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흑인들은 이에 반발해 마틴 루터 킹을 주최자로 하여 선착순대로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과 흑인 버스기사도 고용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 결의안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버스를 타지 않겠다는 보이콧을 실행하기로 한다. 2차 세계대전 맨해튼 프로젝트의 '오펜하이머'와 악연이 있던 당시 FBI국장 '존 에드거 후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흠집을 낼 만한 가십거리 등의 정보를 찾으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이 양반은 정치권도 함부로 못 건들었고 죽을 때까지 국장으로 해먹었다.)
당시 보이콧의 여파로 인해 버스 회사는 심각한 적자에 시달렸다. 흑인들도 버스를 타지 못해 매우 불편한 상황이긴 했지만, 카풀제를 실시하고 자가용을 가지고 있던 흑인들의 자원봉사로 나름의 해결책을 만들어 간다. 몽고메리 시당국은 치졸하게도 킹 목사를 교통법규위반 혐의로 체포하였으며 카풀 봉사자들에게 운전면허취소 처분을 내리는 등 탄압을 가했다.
그러다 결국 연방지방법원과 연방대법원이 차례로 몽고메리의 인종분리 버스 운용정책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폐지되었다. 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은 험악한 공기에서 흑인들이 지도자를 선출하고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고, 마틴 루터 킹을 대표로 하는 '흑인 민권 운동'으로 일체의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1965). 이후 로자 파크스는 흑인 여성의 인권과 노동자 권리 신장에 힘쓰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민중파 리더의 운명인지 '마틴 루터 킹'과 강경파 '말콤 엑스'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래도 그들이 심은 씨앗은 발아했고, 역사는 버락 오바마라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2009 ~ 2017)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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