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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 - 흑인 민권 운동(1950~1960년대) 본문
마틴 루터 킹은 인종차별의 분진이 자욱한 미국에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1955)으로 불이 붙었을 때 'NACCP(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를 통해 흑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끄는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지도자였다. 그는 비교적 온건한 '비폭력 시민불복종'을 필두로 남부의 흑인들을 대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말콤 엑스는 마틴 루터 킹과 비교하면 어린 시절 꽤 굴곡진 삶을 살았다. 북부의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태어나 미시간의 랜싱에서 자랐다. 말콤 엑스는 교도소 복역에서 알게된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소속되어 두각을 드러낸다. 말콤 엑스가 출소한 후 그의 행보에 대해 당시 미국 언론은 마틴 루터 킹의 노선과 반대로 폭력적인 노선을 주장하는 문제아 취급을 했던 것 같다.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로 대표되는 흑인들의 노선은 서로의 영향을 받으며 상승작용을 하는 상호보완적인 존재였다. 후대가 어떻게 평가하든 현실적으로 서로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보완해주었다. 후반부의 말콤 엑스는 조금 더 통합적인, 국제적인 인권 문제를 보는 '마틴 루터 킹'이 되었고, 후반부의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기존 구조 안에서 경제, 빈곤, 본질적인 인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미국을 애초에 '병든 사회'라 칭하는 등 새로운 '말콤 엑스'가 되어 근본적인 개혁을 외치게 된다. 둘은 다른 경로로 세계를 발견한다.
이 변화는 미국의 주류 백인(그들이 진보적이든 보수이든)들의 예상이나 수용점에 급격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한 행보였다. 당시 미국의 정치권에서도 흑인들의 투표권으로 말미암은 세력의 힘을 인식해 민권법 제정에도 힘을 보탰지만 어떤 한계선이 있었다.
역사의 법칙일까?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의 지도자는 '죽음'으로써 신세력을 더 깊게 묶어내고, 후대의 그들을 복제해낸다. 마틴 루터킹과 말콤 엑스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꿨지만 결국 암살당해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하지만 후대의 복제된 이들이 그들의 계통을 이어가는 것 또한 역사의 법칙이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조지아 애틀란타 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부 흑인들의 사정보다는 조금 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영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평온한 삶 속에서 불현듯 나타나는 인종차별의 장면에서 분노와 의구심을 가졌다. 이에 당당하게 물러서지 않고 대응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로자 파크스가 백인에게 좌석 양보를 거부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1955)에서 남부 흑인들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며, 그는 '소로'와 '간디'의 비폭력 투쟁의 계보를 잇고 그 것을 설파한다. 마틴 루터 킹은 집 앞에 폭탄을 배달받기도 하고, 암살 위협을 겪는 등의 탄압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SCLC(남부 기독교 목회자 협회)'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 갔다.
기존 미국의 구조에서 백인 우월주의를 타파하고 백인과의 공존을 꾀하면서 흑인의 인권 향상을 외쳤다. 당시 미국 정치권에서도 '분리하되, 평등'이라는 말뿐인 교묘한 차별논리를 제공하는 분리 정책을 위헌이라 판결한 연방대법원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에 힘입어 흑인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57년에 남부 의원들의 반대를 거친 법안(누더기;)이나마 통과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 등의 공공시설의 분리 정책은 위헌이라는 판례가 생겼어도 현실적으로 차별은 없어지지 않고 각종 린치가 난무했다.
FBI의 '존 에드거 후버' 국장(종신토록 해먹음)의 감시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 경찰의 불합리한 조치와 맞물려 사소한 일이에도 투옥되는 등 조직적인 탄압을 당하게 된다. 백인 전용 식당(?)에서 흑인의 주문을 안 받을 경우 계속 앉아서 저항하기로 한 싯인 운동(1955~1960)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마틴 루터 킹만 4개월의 강제노역형을 받기도 한다.
1960년 대선에서 흑인들의 표심의 영향력이 확인되자 주류 정치권에서 흑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1963년 앨라배마 주의 행진에 이은 워싱턴 D.C.에서의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행진'에서 그 유명한 'I have a dream' 연설이 나오기도 한다.
갑작스런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1963)으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민권법은 드디어 1964년에 통과하게 되고, 마틴 루터 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법 제정 이후에도 현실에서 나아지지 않는 흑인의 삶을 절감하고, 말콤 엑스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원래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적대적인 사이라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힘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고 마틴 루터 킹도 말콤 엑스와 다른 방향으로 진입했지만 마찬가지로 세계를 발견하고 미국이라는 국가의 문제를 자각한다. 현재 들어온 물결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물리적 장벽을 마주친 것이다.
말콤 엑스(Malcolm X)
말콤 엑스는 미국 북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태어났다.(1925) 외할아버지는 백인이며 말콤 엑스는 어린 시절부터 박해를 받으며 자랐다. 목사인 아버지 '얼 리틀'이 백인이 저지른 방화 사고로 죽고, 어머니가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등 다사다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부를 잘했다고 하는데 장래희망을 묻는 선생님에게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가 현실적으로 힘들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청소년기에는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에서 구두닦이, 샌드위치 판매원 등의 일을 했다고 한다. 마약 밀매나 포주 등의 일에도 손을 대기도 했고, 백인 여성 2명의 동업자와 총기 강도 범죄를 저지르고 8년의 기간동안 수감되기도 한다. 백인 여성의 권유로 시작한 일인데 그 2명은 쉽게 훈방조치되었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존 빔비라는 사람을 만나 공부를 시작하고 흑인민족주의, 이슬람교 단체이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알게 되었다. 이후 말콤 엑스는 가석방 후에 두각을 드러낸다. 당시 말콤 엑스는 감옥에서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처음 들었을 때, '눈이 부셔서 뜰 수 없는 빛'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말콤 엑스의 노선은 마틴 루터 킹과는 다르게 미국이라는 구조 '안'에서의 공존이 아니라, 흑인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흑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으며 법이 흑인들을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다면 '무기'를 들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이 노선은 백인 사회와 당시 흑인 민권 운동의 비폭력, 공존 노선과도 맞지 않아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북부 사회에서는 남부보다는 인종 차별이 덜했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도 북부에서 남부로 가는 열차를 타는 중에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산적한 문제가 조금 달랐을 수 있다. 말콤 엑스의 노선은 어떻게 보면 마틴 루터 킹의 후기 행보와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었고, 남부 사회에서의 인권 문제 외의 다음 단계 혹은 더 깊은 부분의 원인으로 경제적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말콤 엑스는 미국 언론에게 '증오를 낳는 증오, 극단주의자, 흑인 KKK단' 등의 규정 공격을 당했고 언론이 말콤 엑스의 강경한 말을 더 증폭시킨 점이 있다. 이로 인해 말콤 엑스의 존재는 마틴 루터 킹의 온건 노선을 백인 사회가 그나마 받아들이게끔 하는 유도장치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상당한 배척을 받게 된다.
마틴 루터 킹과 마찬가지로 후기 행보는 변화를 보인다. 1964년에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하고, 메카 성지순례를 통해 세계를 발견한다. 이 문제가 흑인과 백인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그는 민권운동가들과의 협력을 하며 순화된 어조를 보이며 무작정 흑백분리주의를 설파하지 않고, '투표권'을 총알로써 사용해야 한다는 비교적 온건한 노선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흑백의 문제에서 보편적인 '인권'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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