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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저항 운동 - 제 1, 2차 인티파다(1987, 2000) 본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중동 세계의 갈등은 역사가 깊다. 2023년 하마스가 선전포고없이 이스라엘에 기습침공을 가했다. 중동에서의 역사에 대한 흐름을 보지 않고, 이 사건부터 보면 하마스란 무장정파가 마치 IS같은 테러조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IS는 이슬람에서도 배척당한다.)
실제로 과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사정을 알고 보면 이 바닥은 함부로 선악의 판단을 내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싶은 미궁속이다. 또 이 과정이 아직도 꽤 긴 시간동안 지속되리란 점이 안타깝다.
유대인도 사실 그간의 서양 역사를 보면 많은 탄압을 받아왔다. 13세기 몽골이 활약할 때도 백인들은 애꿎은 유대인들을 털었으며, 무슨 일만 터지면 유대인은 쪼이는 닭이었다.
러시아의 포그롬(1881 ~ )으로 학살, 약탈, 차별 등을 당해 유대인들은 대규모 이동을 하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1939 ~ 1945) 때는 나치 독일의 공장화된 학살 시스템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네타냐후 및 군부 세력만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이스라엘, 그들이 나치 독일의 얼굴과 닮아가고 있다.
1차 세계대전(1914 ~ 1918) 때 당시 영국은 당장의 전쟁에 따른 조급함에 아랍 세계를 끌어들이는 맥마흔 협정(1915),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건국을 지원하는 벨푸어 선언(1917), 향후 프랑스와 중동 지역을 분할하기로 한 피코-사이크스 밀약(1916)을 거의 동시에 맺어 버린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로 인해 곪아터져 나온 갈등을 중재해보려 했으나 GG치고 이 지역을 나가 버린다.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 세계 사람들이 생각한 맥마흔협정과는 다르게 유대인 난민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오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현지인과 많은 갈등이 생산되고 있었다. 이 난민 문제, 인구의 대규모 이동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2024년 현재 미국도 라틴계 사람들의 이주에 따른 분쟁이 점화되어 있으며, 미국의 남북전쟁(1865)도 유럽혁명(1848)에서 말미암은 독일, 아일랜드인의 이주가 큰 영향을 미쳤다. 4세기 훈족, 게르만족의 이동에 따른 서로마 멸망, 중국의 5호16국시대도 대규모 인구이동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러한 공간에서 유대인 무장조직인 이르군(현재 우익정당의 뿌리이자 군의 일부세력의 기원)과 그보다 더 과격한 레히(레히는 영국에 대한 테러, 적의 적은 같은 편이란 논리로 나치 독일을 추종하기도 했다.)는 킹 데이비드 호텔 테러(1946), 데이르 야신 학살(1948) 등의 테러를 일삼았다.
오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당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토착 현지인은 오스만 제국에 속한 아랍 세계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가졌지, 당시에는 민족주의로 뭉친다거나 하는 구심점이 없었다. 팔레스타인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일상에서의 갈등이 표출되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조직적인 테러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건국(1948)과 그로 인해 발생한 4차례의 중동전쟁(1948~49, 1956, 1967, 1973)으로 아랍 세계와의 확전이 되었고,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도 4차 중동전쟁(1973) 후 아랍 세계의 석유 공급 전략에 따른 정치적 변화를 겪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은 이 사이에 끼어 숱한 핍박을 받는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가자 지구, 서안 지구에 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이른다. 지금의 가자 지구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로, 네타냐후의 정치 위기때마다 지지율을 극복하는 인간 사육장이 되고 말았으며, 서안 지구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실상 살 수 없는 이스라엘의 정착촌이 되버렸다.
3차 중동전쟁이 끝난 197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과격파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비행기 납치 사건(인명피해는 없다고 한다, 1970)과 '검은 9월단'의 뮌휀 올림픽 테러(1972)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보복과 재보복의 연쇄적 에너지 분출이었다. 막을 수 없는 에너지의 흐름인 것.
이미 잘잘못을 따지고 중재하기에는 이미 역사가 너무 진행되어 버렸다. 'PLO'는 요르단에서도 거부되어 같은 아랍권인 요르단과 싸우기도 했고, 이를 피해간 레바논에서는 내전에 이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힌 싸움에서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의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학살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당시 레바논 내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행보에 대항해 헤즈볼라가 등장한다.)
제 1차 인티파다(1987 ~ 1993)
외부의 압박이 있으면 내부는 구심점을 가지게 된다.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는 아마 전쟁을 거치며 전부터 생기기 시작했겠지만 이 민중봉기로 인해 표출되었다. 1987년 12월 이스라엘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운 자동차를 덮쳐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장례식에서 반이스라엘 투쟁으로 격화되었고, 또 가자 지구에서 한 소녀가 유대인 노인의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그 노인은 이스라엘 법정에서 무죄를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또 스위치가 되어 더 크게 타오르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은 예방전쟁격으로 단기간에 끝내는 것을 목표로 만반의 준비를 하여 실행한 3차 중동전쟁(1967)에서 수에즈 운하(후에 이집트에 돌려줌)와 골란 고원 일대를 얻었었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도 이스라엘에게 넘어갔던 때였다.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질낮은 일자리만을 얻을 수 있었고 일상에서의 여러 차별과 분리 정책으로 인해 사회의 진입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던 것에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도화선에 붙이 붙었던 거다. 여기에는 어떤 조직의 계획이나 연합이란 것이 없었다. 대규모 봉기에 여러 세력이 손을 얹듯 과격단체 하마스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으로부터 분화되어 이 때부터 등장했다.
이스라엘에 의해 가족, 친구가 목숨을 잃어가니 하마스의 복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조금의 수요는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비폭력노선이 중시되었다고 한다. 이 하마스는 사실 이스라엘이 키워준 단체라는 사실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이스라엘 전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들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1차 인티파다에서 아직 미성년인 팔레스타인 소년들이 이스라엘 군인에게 잡혀가 고초를 겪는다. 적절한 무장도 없는 비폭력으로 출발한 시위대를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무참히 탄압했으며, 이후 PLO의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의 오슬로 협정(1993)으로 공동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는 이츠하크 라빈(당시 이스라엘 국방부장관, 하가나 출신)도 강경한 진압을 촉구했다고 한다.
6년에 걸친 기간동안 수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약 1100~1600명의 사람이 죽었다. 그중 어린이는 약 300명 가량이 사망했다. 이스라엘 측 사망자는 약 200명이라고 한다.
국제적 비난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파타의 수장 아라파트는 이 민중 봉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PLO 지도자의 위치로 자리매김했다.
아라파트는 현실을 반영해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인정하고 공존의 방법을 모색했다. 이후 이러한 이스라엘의 만행으로 촉발되어 팔레스타인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죽다가 국제정세가 개입해 잠깐 정리되는 패턴이 반복된다.
제 2차 인티파다(2000 ~ 2005)
오슬로협정(1993)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철수를 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인정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합의가 지난한 여러 안건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오슬로협정은 팔레스타인에게 매우 불리한 내용의 일시적 합의였으며, 이에 반발한 하마스는 PLO를 탈퇴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가기로 한다. 이스라엘 또한 다 먹으려는 극우 강경파에 의한 불만이 있었는데 결국 이츠하크 라빈은 2차 오슬로협약 체결 후 유대인 극우단체에 의해 암살당한다.(1995)
이후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의 중동평화회담이 결렬되면서 험악해진 공기는 바깥으로 빠져나갈 길을 잃게 된다.(2000) 같은 해 9월, 3차 중동전쟁의 시나이 진격의 전공을 올리고 또 레바논의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책임이 있는 아리엘 샤론이 경찰 병력의 호위를 받으면서 성전산(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한다.
성전산은 유대와 이슬람 각 종교들의 성지인데, 안그래도 불씨가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아리엘 샤론의 권위주의적인 도발에 위협을 느낀 팔레스타인은 2차 인티파다를 일으킨다.(2000)
예루살렘의 구 시가지에서의 시위는 점차 유혈진압의 양상을 띄게 됐고, 이번에는 1차와 다르게 팔레스타인측도 과격해졌다. 한달 동안 대략 6,000명의 부상자와 150명 가량의 사망자가 생겼고,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 무려 공습을 가하기도 한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자살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당시 지원자가 너무 많아 그 중에서 추려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폭탄자살공격의 시초는 1994년이었는데 이스라엘의 바루흐 골드스타인(의사;)가 무슬림에 대한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항해 차량 폭탄 공격을 한 것이었다.
2차 인티파다의 자살공격 지원자들의 사연을 보면 할 말을 잃는다. 변호사인데 온 가족을 이스라엘에 의해 잃어 자살테러를 시도하고 이스라엘인 21명을 죽인 사건, 할머니가 모든 가족들을 잃고 마지막 남은 손자마저 이스라엘에 의해 잃자 시도한 폭탄테러사건 등이 그렇다.
이스라엘은 보복으로 아라파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아라파트가 가장 온건파였고 이후의 파급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아라파트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팔레스타인은 온건한 방법보다는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게 이어져서 현재의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이른 것이다.
이전에도 2006년부터 지속적으로 가자 지구에서 전투가 발발했으며, 국제 정세가 개입하여 멈춰 세우기 전까지 지속되어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인구 교환비는 1:100이다. 이러한 공간과 역사에 단기적으로 누가 먼저 공격을 하였는가로 책임을 판단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생략된 이야기도 많고, 짧은 문장에 담아 깊게 보지 못한 오류가 있을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말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어야 의미가 있다. 말뿐인 공허한 책임론은 현재의 상황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어떤 아이는 부모님을 잃고, 어떤 이는 자식과 친구를 잃고 있다.
서구 사회는 자신들이 뿌린 씨앗인 유대인의 나치 만행을 제지해야 한다. 자신들이 괴롭힐 때는 언제고, 이스라엘을 저 멀리 보내버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안타까워 하는 척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편을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언제까지 이스라엘의 인류에 대한 공격을 봐야 하는지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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