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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흉노족의 역사 1 - 흉노의 세력화 본문
흉노족, 세력으로서의 등장
사마천의 사기에 흉노는 하나라의 후손으로 서주를 밀어버린 훈육과 험윤이 조상이라고 한다.
기원전 4세기말 전국시대에 흉노는 진나라를 공격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BC215에 몽염을 보내 오르도스 지역의 흉노를 축출하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묵돌 선우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죽이고, 선우에 등극했다.(BC209) 묵돌은 명적(소리나는 화살)을 이용해 자신이 명적을 발사하는 대상에게 일제히 사격을 하라고 하였다. 자신의 아내든, 누구든 명적이 도달하는 대상에게 사격을 하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무참히 부하를 죽였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 아버지를 제거하고, 흉노족을 통합한다.
당시 중국은 초한전쟁시대(BC206~BC202)였는데 유방이 한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합한 후, 흉노족과 한의 길고긴 역사가 시작된다. 한고조 유방은 한나라의 변방을 괴롭히는 흉노와 맞서려 직접 친정하였으나, 유명한 백등산 포위전(BC200)에서 위기를 맞아 진평의 기지로 겨우 탈출하고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관계가 된다. 흉노의 왕비는 '연지'라고 하는데, 이 '연지'의 질투심을 이용한 계책이었다. '연지'라는 왕비의 칭호는 은나라 때 '연지곤지', '연지화장'에서 유래한 것 같다고 하는데, 고구려, 신라에서도 '연지화장'을 했다고 한다. '알지'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신라 김씨와의 연관성이 제기되었다. 이 것만 있으면 모르겠으나, 또 다른 증거들이 합리적의심을 가지게 한다.
한반도는 어떨까? 우리는 북방 유목민의 후예인가?
사실 한반도 국가들은 북방 유목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파편적 증거가 꽤 되는 듯하다. 사마천 사기에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며, 흉노의 왼팔(좌현왕)이라고 한 기록이 있다. 신라의 금석에 신라는 흉노의 후예다라는 문구도 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인이 유목민인 스키타이인과 DNA구성이 가장 비슷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런데 어차피 유목민족은 DNA구성이 다양하고, 단일한 민족이 아니긴 하다. 스키타이든 흉노든 북방의 유목민인 것.. 현대의 민족도 그렇지만, 문화권, 생활양식, 유목민족의 시스템을 공유하느냐로 봐야한다. 근대이후의 민족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되고.. 유목민은 프로젝트형 조직이다. 프로젝트 구성되면 뭉치고 헤어지는 것. 고구려 고분 벽화에 말타고 활을 쏘는 모습도 빼박 유목민족의 모습이긴 하다.
묵돌 선우, 흉노의 전성기
암튼 흉노는 타림분지에 위치한 월지와도 전쟁을 시작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점유했다.(BC176) 이후, 월지는 그리스-박트리아왕국(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동방 점령지역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역이 되고, 거기에서 들어섰다.)을 밀어내고 이를 대월지, 원래의 지역에 남아 동화되었던 소월지로 나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하서회랑에 있던 오손도 밀려난다.
당시 한나라같은 정주형 사회의 군사는 흉노 유목민 특유의 치고빠지는 기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전쟁하는 방식자체가 달랐다. 초원은 넓고, 말타고 돌아다니는데 초원을 다 먹을 수도 없고, 좀만 진출하면 보급도 안되고.. 약탈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한나라 여태후는 묵돌의 싸게 보이는 유혹(?)에도 기분나쁨을 표시하지 못하고, 60년간 조공을 바치게 된다. 유목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조직화만 성공하면 세상을 다 먹었다. 묵돌 이후 흉노는 단일한 세력을 이루나, 후대 몽골제국 칭기스칸의 포용적인 조직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퇴직하고 싶게끔 만드는 것이 이후 분열에 단초가 된다.
정세의 변화, 굴욕을 버티고 한나라가 떠오르다.
한무제(BC141~BC87)에 와서 드디어 한나라가 흉노에게 좀 개겨볼 수(?) 있는 정세가 되었다. 초반에는 물을 좀 말아먹었지만, 외척인 명장 위청과 곽거병의 활약으로 서역으로의 통로에 해당하는 하서주랑 지역을 정벌하고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하서 4군을 세우게 된다.(BC133~) 중국사 여러 명장들이 잘 싸워놓고도 숙청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위청, 곽거병은 황제가 밀어주는 외척이었기 때문에 등 뒤(?)를 걱정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막북전투(BC119)가 유명한데, 곽거병은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하며(약탈), 바이칼 호 유역까지 진출한다.
장건이 월지와 동맹을 하러 떠나기도 하였고, 고생 끝에 주변 여러 나라들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고, 비단길을 개척했다.(BC139~BC125) 한나라도 정세의 변화에 긴밀하게 대응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흉노와 한나라는 발하슈호 유역의 오손과 혼인동맹을 맺고, 오손을 자기 편으로 삼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흉노가 오손을 공격한다. 한과 연합해 오손이 전쟁준비를 하자 퇴각한다. 흉노의 세력이 예전같지않음을 보여준다.(BC74)
뒤바뀐 정세속에서 호한야 선우(BC58~BC31)는 5선우로 분열된 흉노를 잠시 통합하였지만, 동흉노의 호한야와 서흉노의 질지로 다시 분열된다.(BC49)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 선제와 협정을 맺어 한나라에 붙는다.(BC51) 질지 선우는 오손을 치려 아랄 해 근방의 강거와 연합하려 하지만, 가는 도중 거의 다 죽고 세력이 약화되고 만다. 결국 한나라의 감연수, 진탕에게 죽음을 맞이한다.(BC36) 흉노의 약화가 몽골초원지역의 한랭화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 원제때, 왕소군을 아내로 맞아들이는데, 굉장히 미인이었다고 한다. 원제는 왕소군이 미인인 줄 몰랐고, 눈물을 삼키고 뒷돈안줬다고 그림을 못생기게 그린 모연수를 처형한다.
왕망의 등장, 흉노의 분열과 둘다 지침
왕망이 선양혁명(가스라이팅)으로 신나라를 건국하고, 한나라가 혼란한 사이 흉노는 다시 전성기를 맞기도 한다. (호도선우, AD18~46) 이후 후한이 세워지고, 흉노는 다시 남흉노(후호한야 선우[일축왕 비]), 북흉노(포노 선우)로 분열되어 남흉노는 후한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게 된다.
후한의 반초가 서역정벌할 당시,(74~94) 북흉노는 구심점이 희미하여 부족화된 상태였다. 후한은 반초 사후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고, 아들 반용이 다시 정벌(123~126)전쟁을 하면서 흉노와도 치고받고 한 것 같다. 흉노는 이후 큰 세력화를 이루어 등장하지 않았으며, 5호16국시절 흉노의 일파였던 선비족이 중원을 장악한다. 흉노의 흔적은 그래도 남아있어, 5호의 한 부분을 구성해 철불흉노(혁련발발), 도객흉노(유연) 등으로 중국의 역사안에서 등장한다.
흉노는 이제 모습을 바꾸어 서쪽으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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