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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의 역사 2 - 훈족 본문
훈족의 등장
유목민의 역사는 무언가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훈족은 문자체계가 없었다고 하며, 당연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흉노족이 활동하던 현재의 카자흐스탄 발하슈호 지역에서부터 유라시아 스텝지대를 거쳐, 흑해연안에서 고트족의 이동을 강제하며 유럽에 등장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재 고고학과 유전자계통분석 연구결과에 따르면, 훈족은 흉노족과 스키타이인과의 혼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사실 유목민족의 혈통은 워낙 여타 유전자와 섞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에 DNA의 유사성으로만 판단하는 관점은 핵심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생활양식과 문화, 조직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봐야하는데, 학계에 관련 연구자료가 부족한 듯 싶다.
여타 유럽과 중국에서의 기록 등을 보면 훈과 흉노를 동일시하는 기록과 사건의 연대기가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전투방식도 같다. 서양쪽에서는 정설이라고 여기는 듯. 아직까지는 그냥 주어진 증거를 통한 합리적인 추론정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진실은 존재하지만, 증거의 부족이 안개를 걷히지 못하게 하는 것. 그런데 모든 사건에는 계통과 족보가 있기 마련인데, 그게 없는 생뚱맞은 출현이 동에서 흉노로, 150여년 후 서에서 훈족으로 나왔다면 둘 사이 연결고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가정이 아닐까 한다. 여타 증거들을 종합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훈족은 4세기경부터 유럽의 역사에 출현하는데, 시작은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알란족을 침공(350~374)했던 일이다. 알란족은 이후 동고트족을 공격하고, 밀어내기식의 게르만족 이동을 가속화하고, 또 훈족 자체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로마는 쑥대밭이 된다. 248년경부터 침입해오는 이민족들(프랑크족, 알레마니족, 유퉁기족, 반달족, 사르마트인, 고트족 등)을 로마는 그래도 어느정도 막아내고 있었으나, 훈족이 씨름하는 선수 중 한사람을 확 밀어버려, 그나마 유지되던 균형을 깨는 데 일조하게 된다.
훈족의 동고트 공격
동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며 분기된 게르만족 집단중 고트족에서 한 번 더 나뉘어진 집단이다. 훈족이 동고트를 공격한 시점(370년경)에 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현재의 루마니아 일대에 있었고, 동고트족이 훈족에게 깨졌다는 소식을 듣고, 긴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 동고트족은 대부분이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가 판노니아(헝가리)쪽으로 이동하거나 흩어진 것 같다. 이 당시, 서고트족은 동고트족의 이민 물결(?)에 대한 혼란까지 겹쳐 로마에 보호 요청을 하게 된다. 당시 로마 황제 발렌스(364~378)는 이를 허가하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현재의 루마니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게 된다.
서고트족과 로마의 싸움
서고트족은 이미 이전부터 로마와 간헐적으로 치고박고 하던 상황이었는데, 로마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때 서고트족의 왕을 인정해주고, 보조금을 주기로 하며 협정을 맺었다. 당시 로마는 규모를 한창 키워가는 젊은 국가에서 이미 키울만치 키운 노인 국가로 변모하였으며, 로마의 우수한 군대와 공병 뚝딱뚝딱 등의 장점이 무색해지고, 넓어질대로 넓어진 국가를 방어해야만 했기에 군대 체계가 비효율적이고, 고비용이었으며, 식민지에서 차출한 이민족으로 다양하게 구성된 군대를 묶어줄 통합이 부재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스타로 보자면 멀티를 너무 많이 먹은 테란과도 같달까? 군비보다 보조금을 주는 게 싸게 먹혔으니, 서고트족이 루마니아 일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서고트의 아타나리크(364~375)는 로마 정치에 줄을 잘못 서서, 로마 황제 발렌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 잃을 게 더 많았던 발렌스 황제는 서고트족과 다시 협정을 한다.(369) 공인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기독교가 서고트족에도 서서히 퍼지고, 서고트는 아타나리크와 프리티게른으로 양분되었다. 로마의 지원을 받던 프리티게른 쪽은 로마의 총독 루피키누스의 학정 및 서고트족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발렌스 황제의 로마군을 아드리아노플에서 격파했다.(아드리아노플 전투, 378) 이 때까지도 로마 및 게르만족은 등자가 없었다고 한다. 훈족이 왜 쎘는지에 대한 하나의 이유가 된다. 여기서 발렌스 황제는 전사하고, 로마의 그라티아누스황제(375~383)는 동쪽 황제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를 임명한다. (당시 로마는 황제가 여러명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 로마는 동, 서로 진짜 분열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뼈군인이었으며, 여러 전공을 세우고 서고트 아타나리크와 협정을 다시 맺게 된다.(382)
훈족의 시리아, 헝가리 방면 진출
이 때까지도 훈족은 일원적인 조직구조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같다. 훈족은 동쪽의 갈래로 아르메니아에서부터 시리아방면 안타키아(현 터키)까지 침략해 일대를 초토화하고 약탈을 벌였다.(395) 서쪽의 갈래로는 울딘(?~?)이 헝가리의 판노니아 초원지대로 진출하여 그 곳에서 옹기종기 다투면서도 공존하던 동고트족, 알란족, 수에비족, 게피다이족 등을 또 밀어내게 된다.(395) 이 해에 로마는 동, 서로 분열되었고, 서고트는 알라리크(395~410)가 그리스 방면을 괴롭혔다. 로마 명장 스틸리코가 오면 빠지고, 가면 와서 괴롭혔다. 판노니아에서 짱박혀있던 동고트족,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게피다이 족 등은 훈족의 울딘을 피해 갈리아 북부(프랑스 방면)로 향하고, 결국 스페인쪽에 정착하게 된다.(411)
훈족은 로마와 이 당시 동맹관계였으나, 동로마를 침공해 괴롭히는 모습도 보인다.(408)
서고트의 로마 점령
서고트의 알라리크는 로마 테오도시우스 1세가 운영한 포이데라티의 장군을 시작으로, 로마내전인 프리기두스전투(394)에서 스틸리코와 함께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알라리크는 로마에서의 출세가 좌절되고, 서고트가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그 수장이 되었다. 그리스 침공에서 스틸리코와의 술래잡기(?) 이후, 일리리쿰의 군사령관이 되고, 동로마군의 자원을 활용하고 준비를 하다 동고트의 유인책으로 스틸리코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탈리아를 침공한다.(401) 스틸리코는 황급히 돌아와서 알라리크를 상대했으며, 둘 사이는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균형상태에 도달하지만 반달족이었던 스틸리코는 모략으로 인해 제거되었고, 알라리크는 이를 명분(?)으로 로마를 포위, 약탈해버린다.(410) 군사력으로 로마를 유린했지만, 황제가 되기에는 장애물이 있다고 여겼는지, 그는 이후 메시나 해협쪽으로 이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해에 휩쓸려 앓다가 죽어버린다.
알라리크의 사후 고트족의 수장은 아타울푸스(410~415)가 되었고, 로마점령 때 납치한 황족 플리키디아와 결혼하여 다시 프랑스 서남부로 향한다. 먹고사니즘에 의해 스페인으로의 이동이 강제되었으며, 그 곳에 정착해있던 반달족 등을 북아프리카로 밀어내며, 서고트 왕국(419~720)이 세워지게 된다. (서고트 왕국은 이후 이슬람 우마이야왕조에게 정복당한다.)
북아프리카로 간 반달족, 알란족 등은 반달왕국(429~534)을 세우며, 훈족 아틸라와 함께 로마 대약탈의 역할을 맡게 된다..
훈족 내부 통합, 괴로운 로마
헝가리 판노니아지역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훈족은 루아(432~434) 때, 여러 유목민, 다른 족들과 내부 통합을 이뤘다.
루아 사후, 아틸라(445~453)는 형인 블레다와 함께 훈족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동로마를 위협하며 조공을 뜯어냈고, 마르구스 주교의 훈족 왕족 무덤 도굴을 구실삼아 동로마를 괴롭혔다.(440) 고트족과는 다르게 공성전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동로마는 귀족들마저도 전 재산을 뜯길 정도로 뼈까지 쪽쪽 빨리게 된다. 반면에 훈과 서로마는 사이가 괜찮았으며, 서고트에 의해 훈족에 볼모로 잡혀있던 아이티우스가 훈족의 장점을 흡수하고, 도움까지 요청할 정도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황제 즉위와 관련된 동, 서로마의 내전에서 이름을 알린다.(433)
아틸라는 형 블레다를 숙청한 것처럼 보이며,(445) 마르스의 검을 이용해 정복자의 위신을 세우고, 내부를 정렬한다. 훈족 아틸라는 싸우다 죽나, 굶어 죽나 이판사판이던 동로마와의 전쟁(447)에서 이기고, 발칸반도 대부분을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든다. 동로마는 뼈만 남은 상태로 계속 살려서 뜯어먹기로 하고, 서로마로 시선을 돌린다.
갈리아(프랑스)방면부터 시작하여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 공방전을 이기고, 프랑스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서로마의 아이티우스는 서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1세(알라리크 아들)를 꼬드겨 헬프를 요청하고, 진격을 시작한다. 서고트는 서로마와 같이 하다 이기는 편에 붙을 생각으로 참여한다. 아이티우스는 프랑크족, 부르군트족과도 연합하고, 훈족은 카탈라우눔(파리 동쪽, 샬롱)에서 진을 친다. (반달 왕국의 가이세리크는 서로마가 갈리아에서 싸우는 동안 뒷통수를 치려고 했다.)
카탈라우눔 전투(451)와 이탈리아 침공
기마민족 특유의 기동성과 당시 로마 군대의 답답한 전투방식(보병은 팔랑크스같은 방진을 주로 쓰고 있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에서 할만한 게 이것밖에 없었을 듯)과의 싸움은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훈족이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매번 큰 피해를 입혔는데, 이 전투에서는 그래도 서로마 연합군이 승리를 거둔다. 서고트 왕국의 토리스문드(테오도리크 1세 아들)의 별동대와 좌, 중, 우익의 몰아주기 방식(지는 건 크게 지게 두고, 나머지 2군데에서는 상대적 우위를 점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선전한 듯 하다.
하지만 아이티우스는 로마에서의 내부 입지를 고민해야했고, 사실 훈족과의 적대적 공생이 필요했으며, 이 아이티우스파와 보나파키우스파의 내부 세력다툼은 카탈라우눔 전투의 승리로부터 스노우볼을 굴릴 수 없게 만들었다.
1년 후, 아틸라는 북이탈리아를 침공(452)하며, 아퀼레이아, 파도바, 베로나, 파비아, 밀라노 일대를 유린한다. 이후 아틸라는 453년에 새 부인과 결혼을 하였는데, 복상사인지 모를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서로마는 혼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의 침공(455)을 받아, 로마는 알라리크 이후로 한 번 더 심한 약탈을 당하게 된다. 스틸리코처럼 아이티우스도 내부에서 제거된 후였다.(454)
이후 서로마는 회복하지 못하고, 로물루스라는 초대와 같은 이름의 황제를 마지막으로 결국 멸망한다.(476)
훈족의 흔적
훈족의 아틸라의 장례식은 이후 13세기에 세계를 연결하게 될 징기스칸의 몽골과도 유사하게 이뤄진 것 같다. 들판 한가운데 대형 천막에서 이루어져 주변에서 말을 타는 의식을 거치고, 무덤의 위치를 알리지 않기 위해 매장과 관련된 사람을 다 죽였다고 한다.(...)
아틸라 사후 훈족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이후의 몽골제국과 같은 조직과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흉노부터 훈족과 이전, 이후에도 유목민족의 역사에서의 대두는 있었지만, 징기스칸같은 조직 체계의 리더와는 다르게 다른 편도 취직하고 싶게끔(?)하는 납득할만한 물자 분배나 대우가 부족했으며, 시대차이도 있긴 하지만 조직 구조를 긴밀하게 구성하는 모습이 없었다. 그래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내부를 통합하더라도 지속가능하지 않아 급격하게 무너지곤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동, 서에서 무서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오랜 훈련을 통한 말과 활에 대한 숙련도의 우위와 등자라는 도구의 우위(등자는 혁명이다.), 자유롭고 신속한 기동에 따른 포지션의 우위, 정주형 사회와는 다르게 지킬 곳이 매번 바뀌는 이동형 체제와 그에 맞는 집단생활양식, 또 그에 반한 정주형 사회의 단점 등이 맞물린 이유있는 결과였다.
이후 유럽에서는 동쪽의 적군은 훈족이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음악, 그림, 문학 등 여러 문화에서 훈족에 대한공포와 트라우마가 남겨지게 되었다. 이건 개인적 추정이지만,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도 흉노, 훈족의 편두에 대한 서양인들의 공포가 무의식적으로든, 역사적 맥락으로든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역사는 또 돌궐(튀르크)과 몽골의 시대 쿨타임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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