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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호16국시대 - 전진, 동진의 비수대전(383)

Toolofv 2024. 10. 15. 16:26

 

화북지방의 전진

 
 
전진의 부견(357~385 )이 부건 사후, 황제에 오른 부생(355~357)을 보내고(?), 황제에 올라 내부를 다지고 영토를 차츰차츰 키워가면서 화북지방의 대세는 전진이 장악한다. 사마씨의 서진 멸망부터 복제된 패턴대로 5호16국시대 각 국가의 최대의 적(?)은 가족 및 친족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이 문제는 근대 이전 국가에서 불거질 경우도 있었지만, 5호16국시기에는 아예 갈등을 조정하거나, 최소화하는 장치가 아예 없었던 듯. 물론 부견부터가 부생을 쳐내고 오른 황제였던 것도 있지만 367년에 전진의 황족들이 대규모 반란(오공의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368년에 부견은 반란을 평정하고 전연과 동진의 낙양전투(369)에 개입해 전리품을 얻고 전연을 지원한다. 이 당시 부견에게는 왕맹이라는 명재상이 있었고, 적절히 부견의 단점들을 커버해주며 서로 시너지를 내는 동반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375년에 왕맹은 병으로 죽고, 죽기 전 함부로 동진을 치지 말 것을 말하지만 부견은 대군을 일으킨다. 
 
전편에서 보았듯, 전연의 모용수(후연, 384~396)가 전진으로 망명하고 전진은 낙양전투에서의 전리품(영토) 문제를 빌미삼아 약해진 전연을 멸망시킨다. 전량(301~376)대나라(북위 전신, 315~376)를 멸망시켜 화북의 최강자로 면모를 다진다.
 

강남지방의 동진

 
 
동진(317~420)은 서진 멸망(265~317) 후, 팔왕의 난(290~306)과 영가의 난(308~316)에서 살아남은 사마예(317~322)가 강남지방으로 피난을 가서 추대를 받고 세워진 나라다. 역시 초반부터 황제는 눈치보기 바쁜 존재였으며, 누군가 전공이라도 세우면 발언권 및 권력이 바로 이동할 게 뻔하기에 초기 이들의 북벌론은 그냥 표면적인 자존심세우기에 지나지 않았다. 조적이라는 동진의 장군은 홧병이 나서 죽었다고.. (이후로도 사마예, 왕돈 등 홧병나서 죽는 케이스가 있다. 울화통이 컸던 듯..)
 
이후 환온이 등장하여 성한 정복(347)과, 낙양을 3년간 점령(356)에 성공하고, 다시 전연과 낙양전투(369)에서 활약하는 등 전공과 더불어 그에 맞춰 목소리도 커지게 되었다. 환온 사후, 환온의 무제한 권력을 견제하던 사안이 권력을 잡게 되는데, 이 사안은 전진의 왕맹같은 동진의 명재상으로 환온도 사안을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비수대전에서 그는 전진 대군에 맞서는 병사들의 동요를 막으려 승전보가 올 무렵,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비수 대전, 양 방향으로의 침공

 
 
전진의 부견은 100만 대군(실제로는 좀 다를 듯)을 일으켜, 현 중국 수춘방면으로, 모용수(이후 후연, 384~407)와 요장(이후 후진, 384~417)은 방향을 달리 하여 형주쪽으로 진출했다. 
 
부견은 직접 공격하여 수양(수춘)을 함락시키고, 동진은 연이어 초반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래도 동진의 군사는 수가 적지만 정예병이었는지 낙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뢰지의 동진군이 승전을 거두기도 한다.
 
수춘성의 밖에서 비수를 앞두고 양 군은 대치를 하게 되었는데, 동진군이 한 판 제대로 싸워보자며 강을 건널 수 있도록 군을 조금만 뒤로 물러달라고 했다. 여기서 허망할 정도로 급격하게 양상이 변화하였는데(!), 그만 전진의 대군이 퇴각을 하다, '뭐야? 진겨?' 하면서 대열이 붕괴되고, 퇴각이 퇴각을 부르고, 혼란이 혼란을 부추기는 형세가 되버린 것. 
 
역사적으로 이런 전투의 흐름이 꽤 있다. 대군을 운용하면서 당시의 통신, 신호 체계로는 여러 상황을 대비하여 다양한 전술의 사용이 불가했다. 현대에도 사실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전열에서 퇴각하는 병사들의 혼란은 뒤로 급격히 전염되어 자멸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조선에서도 거의 1000년 후인 임진왜란(1592~1598) 때의 용인 전투(밥짓다가 붕괴..), 이후 인조 때의 이괄의 난(1624) 때의 무악재 전투가 있다. 비수전투에서 전진군의 사기 문제도 있었겠지만, 원래 대군을 끌고 시스템을 굴리기는 어려운 것이다. 스타크래프트같은 게임이라면 퇴각하고 싶은 데까지 퇴각하고 전열을 전투에 맞게 컨트롤하는 게 마우스질 몇 번에 가능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상당히 어렵다.
 
또 이 퇴각에 이은 퇴각 붕괴 구도의 도화선은 새로운 도구의 우위나 전술의 우위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역사상 소군이 대군을 격파한 전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특히나, 예전의 전쟁은 더 그런 면이 부각된다. 조선시대 이성계, 이순신의 전승도 딱 맞는 사례는 아니겠지만 그 도화선을 장악했다는 점은 같다.
 

비수 대전 이후의 변화

 
 
전진의 영끌 대군이 무너지고, 화북 지방의 균형이 무너져 전연에서 망명하고 비수대전에 참전했던 모용수가 후연(384~407)을, 신하였던 강족 수령 요장이 후진(384~417)을, 걸복부 선비족 걸복국인의 서진(걸복진, 385~431)을, 역시 신하였던 모용부 선비족의 모용홍이 서연(384~394)을 세워 화북지방은 다시 혼란기로 접어든다. 전진의 부견 일족은 사방의 적으로 인해 멸망한다.(394)
 
사실 동진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는데, 허무하게 승리를 거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후 동진은 전진의 무너짐과 맞물려 위의 분열된 나라들과 같이 빈 자리를 차지해 어느 정도의 북벌을 이루게 된다. 사안은 황제 사마요(372~396)의 동생 사마도자(397~403)의 공신 견제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사마씨 황족들은 사안은 견제하였으나 공을 세운 군벌들인 환현, 손은, 유유 등의 연이은 쿠데타에 이어, 유유(420~422)마지막 황제였던 사마덕문(공제, 420~421)을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유송(420~479)왕조를 개창한다.
 
이후 화북지방은 북위(386~534)의 탁발부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고구려 또한 거란, 말갈과 같이 강자로 떠오른다. 혁련발발의 대하(407~431), 모용운(고구려계)의 북연(407~436), 후량(386~403)에서 독립한 저거몽손의 북량(397~439), 몽골 오르콘 강 유역에 기반을 둔 선비계열 유목제국 유연(330~555), 돌궐(552~745)까지 비수대전 이후 거의 200년동안 수나라(581~619)가 중원을 통일하기까지 여러 국가들의 각축이 벌어진다. 
 

<비수대전(383) 지도 - 위키백과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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