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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내전의 시작,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 1546~155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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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내전의 시작,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 1546~1552)

Toolofv 2025. 2. 9. 03:27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 1546~1552)은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제후국들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슈말칼덴 신교 동맹을 맺음에 따라 구교 가톨릭 진영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다. 소빙기로 인한 생산력 감소와 전염병 창궐, 귀족의 쎈 입김, 종교에 대한 비판이나 봉기들은 그 전에도 그랬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1450년경)에 맞물려 정보 유통의 속도는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여기에 루터의 95개조 반박문(1517)이 그 물살을 탔다. 독일어가 보급되면서 가톨릭의 문자 해석권에 기반한 주요 기득권에 서서히 금이 갔다.
 
여러 제후국들은 신교를 통해 구교에 대한 경제적 의무에서 벗어나려 했다. 종교에 대한 교리는 그냥 하는 말이었고 사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신교는 구교의 세력과 먼 쪽에서부터 주로 받아들여졌다. 독일 지역에서도 주로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은 종교 개혁과 그에 따른 갈등에 휩쓸려갔다. 슈말칼덴 전쟁이 끝나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로 제한적인 루터파에 대한 제후국의 종교적 자유가 생겼지만 칼뱅파에 대한 부분은 당시 합의된 바가 없었고 30년전쟁(1618~1648)까지 긴 혼란기를 보내면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개념이 점차 명확해진다.(당시 독일은 쑥대밭이 되었다.)
 
 

<카를 5세(1519~1556) 그림, 그는 아메리카 잉카, 아스텍 정복, 독일 농민전쟁, 프랑스와의 파비아 전투, 로마대약탈, 합스부르크-오스만 전쟁, 슈말칼덴 전쟁 등 당시 굵직한 사건을 다 겪었다. 출처:나무위키>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 1546~1552)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1519~1556)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에 슈말칼덴 동맹에 맞서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종교적 대립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갈등도 포함하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제후국들에게 로마 가톨릭을 강요하며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많은 제후국들은 신교를 통해 구교와 황제의 간섭을 벗어나려 했다. 
 
카를 5세는 5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고 신성로마제국으로 들어왔다.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지만 지휘계통의 통합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연합된 군대를 결성하지 못했고 카를 5세의 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한다. 카를 5세는 뒤이어 그나마 구심점이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와 작센 선제후국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공략했다. 비텐베르크 근처의 뮐베르크에서 슈말칼덴 동맹은 패배하게 된다.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1548)로 개신교를 포용하는 척하면서 가톨릭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전쟁 승리 후 카를 5세는 당시 합스부르크 영토이던 네덜란드에서 <피의 칙령(1550)>을 내리고 개신교 신자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이 때 네덜란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독선적인 통치 방식은 신교는 물론 가톨릭 세력도 불만을 갖게 했다. 당시 바깥에서 돌던 카를 5세를 대신해 신성로마제국을 관리하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점차 제후국들이 붙었다. 카를 5세도 오스만의 위협을 감지하고 내부를 통합하려 했지만 오히려 내부의 반항을 부추긴 셈이었다. 이에 점차 제후들이 떠났다.
 
그리고 카를 5세는 30년동안 독일을 다스리던 동생을 버리고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의 영토를 물러주려고 했다. 이러한 점에서도 제후들은 반발을 했다. 결국 카를 5세에게 불만을 가진 작센 선제후 모리츠(원래 작센-마이센 공작이었다.)가 배후에서 제후국들을 결집했다. 카를 5세만 없으면 독일이 하나같지않은 하나가 되는 분위기였다. 오스만의 압박이 작용했다. 신교 세력도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했다. 결국 프랑스까지 포함한 반합스부르크 동맹이 만들어져 황제를 내쫓기 위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1552)
 
모리츠의 개신교 군이 남부 독일을 휩쓸었고 카를 5세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된다. 이후 다시 세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아무도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1555년에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면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화의는 "제후국"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루터파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칼뱅파와 같은 다른 개신교 종파들은 여전히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고, 개개인에 따른 자유가 아니라 제후국이 가톨릭, 루터파 중 하나로 정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슈말칼덴 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유럽에서 종교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전쟁의 공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되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불완전함은 이후 또 한 번의 불씨가 된다. 가톨릭은 갖고 있던 꿀단지를 뺏겼다. 30년 전쟁(1618~1648)까지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 지역은 쑥대밭이 되었다. 끔찍한 전쟁의 참상은 역설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받아들이게 하는 물리적 장치가 된다. 말로만 하는 ‘종교의 자유’를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게 안되면 큰 손해라는 인식을 해야만 모두가 납득을 하는 것이었다.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 기념 엽서 출처: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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