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olofv 님의 블로그

피로스 전쟁(BC280~BC275) - 피로스의 승리 본문

역사

피로스 전쟁(BC280~BC275) - 피로스의 승리

Toolofv 2024. 12. 20. 18:38
반응형

 
시사 용어중에 '피로스의 승리'와 '파비우스 전략' 또는 '파비우스의 승리'라는 말이 있다. 보통 기분내고 이겨도 손해로 귀결되는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하고, 반대로 개별 전투에서는 밀리는 듯 하지만 큰 대전략으로 비롯해 결국 승리를 거두는 방법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한다. 실제 이 용어들의 유래는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일까? 
 

피로스의 승리 : 이겨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승리. 피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에게 말했다. '로마를 상대로 한번만 더 이기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

파비우스 전략 :  싸우지 않고 이기거나, 개별 전투에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결국 큰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피로스의 승리'와 '파비우스 전략'을 생각할 때 전략과 전술, 전쟁과 전투를 어떤 범위로 할 것인지 이 용어만으로는 모호하다. 용어의 의미는 모형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큰 전략·전쟁의 승부와 전술·전투의 승부는 다르다. 전투의 승리를 쌓아가는 개념으로 충실하게 승리를 쌓더라도 전쟁의 승리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
 
전략과 전쟁의 대원칙은 역사의 방향성, 자연의 효율성에 의해 조달된다. 이길 팀이 이기게 된다. 꼭 진짜 전쟁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역사의 방향성과 결이 맞으면 작은 전투들의 패배가 있어도 결국 이기는 방향으로 간다. 지속가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맞지 않으면 전투를 대부분 이겨도 초한 전쟁의 항우처럼 큰 싸움에서 진다. 물론 하수끼리의 싸움에서는 '기세'가 작용해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고 전의를 상실시켜 이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것은 상대의 실수다.
 
'피로스의 승리'는 작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큰 싸움에서 에너지의 유입과 결을 맞추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큰 싸움에서 이긴 후에야 작은 싸움의 승리가 의미를 가진다. 작은 싸움의 승리는 큰 싸움의 승리를 실현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피로스 전쟁(BC280 ~ BC275)

 
 
역사를 길게 보면 인간이 진보해온 것은 맞는데, 부분적으로 일부 어떤 지역이 1000년이 넘은 정체가 있을 수도 있다. 중세 유럽과 고대 로마를 볼 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은 근대를 맞이하기까지 고대 로마보다 못 살았다. 문화, 위생, 수도 및 편이시설 등 모든 게 그랬다. 
 
기원전의 로마는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까지는 왕정의 체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시민들도 가세해서 왕정이 붕괴했고, 공화정 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하면서 제정의 형태로 변한다.(동아시아의 제정과 좀 다르다.)
 
로마 공화국 시절에 3차례의 삼니움 전쟁(1차:BC343~ BC341, 2차:BC 326 ~ 304, 3차:BC298 ~ BC290)을 거치고 난 후,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후 현재 이탈리아 타란토에 위치한 '타라스'라는 그리스계 도시가 로마에 깨지고 항복을 하기로 한다. 이를 에페이로스 왕국이 지원하겠다고 나서 '피로스 전쟁'이 발발한다. 피로스 1세는 원래 마케도니아에 포커스를 두고 있었지만 여기서 돈 좀 벌고 가자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아 전투(BC280)

 
 
에페이로스 왕국의 피로스 1세는 BC280년 봄에 약 2만5천의 병력들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로 상륙했다. 동맹군으로부터 지원받은 전투 코끼리도 함께였던 것 같다. 당시 로마의 집정관 라이비누스는 비전투 병력을 빼고 약 4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한다. 피로스 1세와 시리스 강을 두고 각자 포진하게 된다. 떠오르는 로마의 군단병과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역사상 최초의 싸움이었다고 한다.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의 손실은 약 만오천명, 에페이로스군의 손실도 비슷했다. 피로스 1세는 전투 코끼리를 투입해 측면을 위협하던 로마 기병들을 몰아냈고, 에페이로스의 테살리아 기병들이 로마의 군단병을 공격함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도 손실이 조금은 뼈아픈 상황이었다고 한다.
 

아스쿨룸 전투(BC279)

 
 
피로스 1세는 전투의 승리를 거두고 로마의 패배 소식 전파로 정복당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길 기다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대로 로마의 편에 남았으며, 에페이로스에 붙은 부족들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의 정복 정책이 매우 온건했던 점이 작용했다. BC279년 북상한 피로스 1세는 이탈리아 남동부의 아스쿨룸에서 다시 로마군단과 만난다. 
 
이번 전투에서도 팔랑크스의 이점으로 유리한 전투를 치뤘다. 그렇지만 아직 전투의 승기를 잡은 상황은 아니었다. 새벽에 피로스 1세의 병력들은 험한 지형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고, 다음 날의 전투에서도 전투 코끼리와 기병들의 활용으로 로마군이 패퇴했다. 
 
로마군도 약 8천의 병력 손실이 있었지만 피로스 1세는 이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번만 더 이기면 우린 모두 끝장이네?" 손실이 쌓이고 있었다.
 

베네벤툼 전투(BC275)

 
 
피로스 1세는 로마에게 강화조약을 맺고 어느 정도 위엄을 유지한 채 퇴각하고 싶었지만 로마는 거부한다. 이에 피로스 1세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자 했는데, 카르타고도 의도대로 되지 않고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퇴각은 하고 싶은데 전리품이 없었다. 이도저도 아니고 더 이상의 손실이 있다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시칠리아의 동맹 요청에 따른 지원으로 카르타고군과 싸워 또 이겼지만 병력의 손실이 생겼다. 병력의 보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다시 로마의 타라스 압박이 가시화되고 BC275년에 에페이로스 군은 시칠리아에서 다시 이탈리아로 상륙한다. 피로스 1세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군은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의 지휘로 남쪽으로 이동했다. 야습을 시도해 로마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로마군은 이미 이를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 또 삼니움족의 필룸 투척 방법을 익혀 전투 코끼리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하고 있었다. 결국 피로스 1세는 2/3의 병력을 잃고 급히 군대를 철수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들도 하나둘씩 로마의 동맹시로 흡수되었고, 로마는 카르타고와 불꽃을 튀기게 된다.
 

<피로스 전쟁(BC280 ~ BC275), 출처 :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Pyrrhic_War#/)>

 

 

 

 

파비우스 전략과 제2차 포에니전쟁(BC218~BC202)

파비우스 전략은 상대의 전투 단계의 강점을 봉쇄하고 지연전을 통해 보급의 한계를 강요하면서 요지를 점령하는 식의 전략적 대응 방법이다. 제2차 포에니전쟁(BC218~BC202)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toolofv.tistory.com

같이 보기 : 파비우스 전략과 제2차 포에니전쟁(BC218~BC20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