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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ofv 님의 블로그
한국 정당 국민의 힘의 뿌리 1 - 민주공화당(1963~1979), 유신정우회(1973~1980) 본문
2024. 12. 7. 한국의 온 시민들과 국회의원, 전세계가 주목한 내란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 소추안 표결에서 국민의 힘은 단체로 자리를 비웠다. 탄핵 의결이 되는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12월 7일에는 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고, 전후에 연동된 여러 사건들과 같이 평가될 것이다. 역사가 움직이는 큰 틀은 이미 정해졌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잔가지로 분기되는 자식 사건들이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는 구체적으로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어떻게 보면 자연과 역사의 장면을 저버린 한국의 정당 '국민의 힘'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한걸까?
민주 공화당(1963 ~ 1979, 박정희 시기)
이승만 정권 시기에 자유당(1951~1961)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4. 19. 혁명과 5. 16. 군사정변을 거치면서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이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61년의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가 군정을 실시하면서, 대한민국 헌법을 정지시킨 데에 따른 부담을 덜 요량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민간이양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공화당(1963~1979)'이란 정당이 만들어졌는데 이 정당부터가 뿌리가 된다. 박정희의 후반기는 물론 비판받아 마땅한 독재자였지만, 초기의 군부는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집트 낫세르의 혁명과도 비견되었던 면도 있었다.(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정치프레임을 걷고 봐도 후반에 때려 죽일 독재자였지만 초반은 시대 상황을 고려해 평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민주주의 의회 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민주공화당'을 그냥 구색을 맞추는 도구정도로 생각했다. 이 때도 여러 정당 인사들, 검사, 판사, 변호사, 관료, 언론인 출신의 소위 엘리트 정당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 직무대행과 정당의 총재를 겸직했고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구색을 맞추는 것이었지,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통과시켜라 하면 통과시키고, 부결시켜라 하면 부결시키는 독재 체제의 하부 조직에 불과했다.
이를 잘 볼 수 있는 사건은 4. 3. 항명사건이다. 1969년도 문교부장관 권고병에 대한 해임권고건의안 통과에 대해 "1주일안에 이번 사건을 주동한 반당분자를 철저히 규명하여 그 숫자가 몇 십명이 되더라도 가차없이 처단하라." 라면서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들을 '처단'할 것을 요구했고, 실제로 관여한 소속의원들이 의원총회에서 제명되었다.
뒤이은 10. 2. 항명파동사건(1971)으로 3선개헌(1969)에 전공을 세우고 기세등등했던 4인방(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의 국회의원들도 숙청되었다. 잘나가던 그들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러한 항명파동 사건은 독재 체제 내에서 이루어진 권력 투쟁일 뿐이었다. 이들의 태생은 독재 정권 하에서 그 체제를 옹호하는 정당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김대중의 1971년 대통령 선거 연설에서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으로 날치기되었던 3선개헌 제7호 헌법을 대체하고, 국회를 권한없이 해산했으며 계엄령을 선포해 군대를 동원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군대에 의해 고문을 당했고, '새로운 정부 체제에 협조한다.'는 각서를 받고서야 풀어주었다고 한다.
유신 정우회(1973 ~ 1980, 박정희 시기)
유신헌법이 부정으로 얼룩진 방법으로 90%가 넘는 찬성율을 자랑하는 국민투표를 통해 선포되었고, 1973년에 유신정우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민주공화당은 탄생의 이유와 같이 독재정권에 기를 못 펴는 무기력한 정당이었고, 그나마도 유신헌법에 따라 1/3을 대통령이 지목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찬반투표를 거쳐 선출하는 유신정우회에 의해 대체되었다. 사실상 대통령의 친위세력인 위성정당이었다. 조선시대 영조의 탕평파처럼 유신 체제를 옹호하는 세력들로 채워졌으며 창설 이유가 '대통령이 창출한 유신 이념을 국정에 반영한다.'였다.
국회의원의 1/3을 결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임명되면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유신체제에 순응하는 학자, 교수, 언론인, 문필가 등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금뱃지를 따고 거수기 노릇을 했다.
1979년 10. 26.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사망하고 신군부 전두환이 정권을 차지한다. 하나회 출신인사들로 이루어진 민주정의당에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가 흡수되었고, 언제나 그렇듯 당의 성향에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이동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군부에 의한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반공주의를 외치면서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의 세력이었다.
이 민주정의당은 3당합당(1990)으로 김영삼의 민주자유당(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으로 이어진다. 이 민자당이 일부 민주당 세력과 함께 한나라당(1997)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그리고 국민의 힘은 한나라당을 전신으로 한다.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의 재산 등을 이어받은 신군부 인사들의 민주정의당(1981~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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