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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프랑스의 볼테르와 샤틀레 부인

Toolofv 2024. 11. 19. 23:47

 
볼테르(1694 ~ 1778)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5세가 집권하던 시기에 활동한 계몽사상가이자 작가이다.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Tolerance)'의 아버지이다. 관용을 이야기할 때면 나오는 아이콘이다. 그의 본명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François-Marie Arouet)'
 

볼테르의 젊은 시절

 
 
볼테르는 당시 부르주아지, 부유한 공증인 아버지로 인해 꽤 윤택한 생활을 했다.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고, 귀족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그의 대부 샤토뇌프 신부가르 템플(le Temple)이라는 사교 모임에 데리고 나가면서, 여러 자유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법조인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볼테르는 문인이 되고자 했다. 법학 대학을 다니면서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717년에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풍자한 시를 썼다가 바스티유 감옥에 11개월간 수감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악행을 보았네. 나는 스무 살이 아니었다네."라는 구절때문이었다. 볼테르는 감옥에서 비극오이디푸스(Edipe)를 집필하였고, 출옥 후 대성공하여 이름을 날린다. 이 시기부터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날에 귀족 슈발리에 드 로앙이 볼테르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고, 볼테르도 맞서 대응하다가 그의 하인에게 폭행을 당한다. 볼테르는 자신의 귀족 친구들이 볼테르를 옹호하기보다는 같은 귀족 드 로앙의 편을 드는 모습에 그가 살던 세상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귀족들의 배척으로 인해 그는 또 다시 바스티유 감옥에서 콩밥을 먹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한동안 영국으로 건너가 있겠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이런 구도에 미래 프랑스혁명(1789)의 씨앗이 있던 셈.
 
볼테르는 영국에서 카페에 드나들며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했고, 존 로크와 뉴턴의 저서에 큰 영향을 받는다. 1728년 파리로 돌아온 볼테르는 1734년《철학서 간(Lettres philosophiques)》이란 책을 발간했다가 검열당국에 의해 불온도서(?)로 지정되어 또 쫓기는 몸에 된다. 자신의 후견인이면서 애인이었던 샤틀레 부인(Madame du Châtelet)의 영지에 숨어지낼 수 밖에 없게 되고 그는 이 곳에서 10년간 지내며, 저술과 연구에 매진한다. 
 

과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

 
 
에밀리 뒤 샤틀레(1706 ~ 1749)의 태생은 귀족이며 아버지는 루이 14세의 수석비서였고, 귀족임에도 여성은 교육받지 않던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드물게 일반적인 귀족 남자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봤다. 그녀는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지속하다, 1727년경부터 파리의 사교생활을 즐겼다. 그녀의 연인 중 모페르튀는 고등수학과 당시 프랑스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뉴턴의프린키피아(Principia)》를 샤틀레 부인과 같이 공부한다. 
 
그녀의 연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볼테르일 것이다. 볼테르와 10여년간 연인 사이였으며, 둘은 남편이 소유한 '시레이성'을 과학탐구기지로 탈바꿈해서 같이 살았다. 이 성은 베르누이같은 과학자들도 장기간 있다 가기도 하고, 신진 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샤틀레 부인은 볼테르가 안전할 수 있도록 해줬고, 볼테르는 샤틀레 부인에게 지식인과의 교류에 대한 부분을 채워 주었다. 
 
샤틀레 부인은 뉴턴의 프린키피아 연구에 몰두했고, 물체의 운동에너지에 대한 뉴턴($mv$)과 라이프니츠($mv^{2}$)의 논쟁에서 라이프니츠의 이론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주춧돌을 얹었다.(지금은 상대성이론에 의해 로런츠 인자를 적용한 식이 정확하다고 한다. 일상에서의 속도라면 고전역학의 운동에너지 공식과 같아진다.) 또 사고실험만으로 적외선 발견의 초석을 닦았다. 프린키피아 번역 및 해설서를 발간했으며, 샤틀레 부인에 의해 이 책이 훌륭하게 번역되고, 상세히 해설되어 당시 프랑스의 과학이 영국보다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젊은 시인과의 관계에서 임신을 하게 되는데, 무언가 불안함을 감지했는지 연구를 서두른다. 1749년에 왕립 도서관 감독에게 그동안 연구했던 뉴턴에 대한 번역 및 해석 원고를 보내고, 결국 출산 중 감염으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에는 의학의 위생관념이 미비했다고.
 

<과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 네이버 펌>

 

"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 세개의 굴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볼테르는 샤틀레 부인의 죽음 이후, 프로이센으로 향하게 된다. 계몽군주의 상징 프리드리히 대왕과 좋은 관계를 쌓고 교류하다, 다시 제네바로 향했고,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 근처의 투르네와 페르헤의 토지를 사들여 마을을 만들었다. 스위스에서 문제가 되면 프랑스로 도피하고, 프랑스에서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도피할 수 있었다. "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 세개의 굴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곳은 인구 50명의 척박한 곳이었지만 직물공장, 시계공장 등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유입시켰다. 여기서도 왕성한 저술을 하여 '볼테르 시대'를 이룩했다. 디드로 및 백과전서파의 작업에도 협력한다.
 
개신교를 믿는 칼라스라는 사람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사건이 발생했다. 명백한 누명이었지만 판사들이 칼라스가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제대로 보지 않았다. 볼테르는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사건의 공론화 및 사건분석 등을 통해 재심을 이끌어내고,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을 받아낸다. 1763년 쓰여진《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이 쓰여지기도 했다.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 1759》도 이 시기에 쓰여진 그의 소설이다. 
 
볼테르는 1778년 루이 15세 사망 이후 프랑스로 귀환하게 되며, 그의 나이 84세였다. 그의 귀환 행사에는 루이 16세도 질투를 할 정도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에 온 후, 그 해에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보지 못했다. 그의 유해는 1791년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삶은 난파선이지만 우리는 구명보트에서 노래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고한 자를 비난하느니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게 낫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전유물이다. 우리는 모두 약점과 실수로 만들어졌으니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는 것, 이것이 자연의 첫 번째 법칙이다.


 
볼테르는 로마가톨릭 교회에 각을 세우고, 관용을 배척하는 종교 광신주의를 평생 비판했다. 언제나 거들먹거리는 권위주의와 싸웠으며, 볼테르가 무슨 책만 썼다고 하면 감옥에 가거나, 도망가거나 추방당했다. 그는 수완이 있었는지 주식이나 대부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여러 재밌는 말들을 남겼으며, 신은 인격적인 신이 아니고 시계제작자로서의 신이라는 이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볼테르는 어떤 이론을 남기기보다는 기존의 권위에 대항하는 '안티테제'의 성격이 짙었던 것 같다. 청나라를 도덕적으로 올곧은 사회라고 추켜세웠다는데, 이 것도 유럽 사회를 까려는 구실이었던 듯. 당시 계몽주의도 시대적 한계나 오류가 있었지만 맞는 방향이었다. 그는 그래도 그 시대 드물게 깨어난 근대인이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키워낸 새로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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